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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May 17. 2023

1화 – 기쁜 예감은 종종 틀리지 않는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엄마랑 오랜만에 눈싸움을 했다. 눈을 깜빡이지 않고 오래 뜨고 있는 건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눈싸움은 재밌었다. 아빠는 회사 일이 늘 많아서 잘 볼 수 없었고 동생은 너무 어렸으니 눈싸움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때 나는 한창 승부욕에 불타는 나이였다. 축구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것에도 누구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엄마랑 눈싸움을 시작할 때 우연히 시계를 봤다. 내 방 책상 위에 걸려있던 하얀 시계는 오후 4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시부터는 다시 숙제를 해야 하는 시간이라 5시까지는 15분 남았다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와의 짧은 눈싸움 끝에 나는 이겼고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와 내 학교 친구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눈싸움과 학교 성적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방금 눈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시험도 다 이겨야 한다고 했다. 어렸던 나는 그 때만 하더라도 엄마 말은 다 옳다고 믿었으니까 엄마가 하는 말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엄마의 긴 설교가 끝나자 나는 아쉬웠다. 이제 숙제 할 시간이 되었을 것 같았으니까. 엄마 모르게 한숨을 쉬며 시계를 봤을 때 시계는 여전히 4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의 긴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분명 10분은 지났어야 할 시간인데 여전히 시계는 4시45분이었다.    

  

 아무래도 시계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엄마! 근데 시계 고장 났어?”

 “시계? 건전지 바꾼 지 오래된 것 같긴 하다. 새 건전지를 내가 어디에 뒀더라.”

 “거실에 있는 TV 서랍장에 넣어두지 않았어? 내가 찾아올게.”    

 

 건전지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는데 희한한 걸 또 발견했다.     


 “엄마! TV도 고장 났는데? 근데 TV가 고장 나면 이렇게 화면이 멈추나? 컴퓨터 랙 걸린 것 같네.”

 “뭐? TV가 안 돼? 네 아빠가 TV 잘 안다고 이상한 브랜드 사올 때부터 내가 느낌이 이상했다. TV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고장이 나!”     


 이 상황을 모르고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아빠는 이따 집에 오면 엄마한테 혼 좀 나게 생겼다.   

  

 이게 눈맞춤에 관한 내 첫 기억이다. 멈췄던 시간이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그 이후로 한동안 다시 눈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고, 눈맞춤 세계에 다시 들어갈 기회도 당연히 없었다.     


***     


 나의 새해 소원은 늘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로 시작했다. 엄마의 서울대에 대한 집착은 엄청났고, 엄마의 주입식 교육 효과도 엄청났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서울대에 가야한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중학교 1학년 기말고사에서 내가 전교 2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오던 날 엄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들, 넌 전교 2등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치?”

 “응? 나 중간고사에서 전교 38등하다가 이번에 전교 2등 했는데? 엄청 잘한거 아닌가?”

 “그래. 엄청 잘했지. 그래도 우리 아들의 진짜 자리가 이제 코앞에 있어.”


 엄마의 저 말은 역효과를 냈다. 난 2등의 저주에 걸렸고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하지 못했다. 우연히 홍진호라는 프로게임머를 알게 되었는데 내 삶과 정말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1등은 눈앞에 있고 곧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매번 2등만 하는 나를 1등을 제외한 다른 모두가 부러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올해만큼은 소원을 다르게 빌었다. 서울대를 가고 싶다는 소원을 잠시 넣어뒀다. 내겐 더 중요한 소원이 있었으니까. 서울대 가고 싶다는 소원은 고3이 되는 내년에 다시 한 번 하면 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했으니 하늘도 이해해주시겠지.     


 ‘라영이랑 같은 반 되게 해주세요. 제가 이런 소원 처음 비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 한번만 들어주세요. 고등학교 딱 2년 밖에 안 남았는데 한번만이라도 같은 반 시켜주세요. 혹시 다른 사람이랑 헷갈리면 안 되니까 제가 그 애 이름을 정확히 한 글자씩 말씀드릴게요. 김.라.영.. 꼭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늘은 한 번도 내 소원을 안 들어주셨지만 이번만큼은 들어주실 것도 같다. 동전을 던져서 계속 앞면만 나오면 이번에는 왠지 뒷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물론 수학 천재인 나는 잘 안다. 확률은 여전히 반반이라는 거. 앞면이 연속해서 열 번 나왔다고 하더라도 열한번째 던지는 동전이 뒷면이 나올 확률은 여전히 50%라는 걸. 내가 전교 2등인데 이걸 모를까. 그래도 기분 탓이란 거 무시하면 안 된다. 여하튼 올해는 느낌이 좋다.     


***     


 개학 첫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실에 좀 일찍 온 터라 아직 학교에 온 애들이 거의 없었다.    

  2학년 4반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난 라영이의 존재부터 확인하고 싶었지만 영만이 목소리부터 들렸다.    

 

 “장유준이. 나랑 같은 반이네?”

 아. 정말 지긋지긋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4년 연속 같은 반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뭘 그렇게 쳐다 보냐. 또 이쁜 여자 있나 보고 있지? 하여튼 사람 쉽게 안 변해요.”

 아. 영만이는 나를 정말 잘 아는 군. 이래서 최측근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주영만이라는 놈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친구다. 처음 알게 된 후로 4년째 같은 반이 되었으니 안 친해지기도 어렵다. 착하고 착실한 놈이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이 있다면 바로 금사빠라는 거다. 조금만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으면 바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안타깝게도 그 사랑은 늘 일방적이라서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지만. 남중을 다닐 때는 교회 누나부터 시작해서 학원 친구까지 주영만이 고백했던 여자가 10명은 됐던 것 같고, 지금 고등학교에 와서는 작년에만 5명에게 고백했으나 모두 차였다. 그렇게 못난 남자는 아닌데 사랑에 있어서는 매우 서툰 것 같다.     


 영만이 말고 또 누가 있나 교실을 스캔하다가 기분이 나빠졌다. 임병달이 우리 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놈... 하필 우리 반이냐. 병달이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유명한 양아치였다. 친구들 돈 빼앗는 건 기본이고 기물 파손에 기이한 행동까지... 정말 문제가 되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하던 놈이었다. 게다가 중학교는 남학교였기에 난폭한 행동은 더 심했다. 당연히 공부를 못해야 맞지만, 협박을 이용한 커닝으로 우리 학교로 왔다. 그리고 이번에 나랑 같은 반이 됐다.      


 “야! 근데 어디에 앉아야 하지?”

 영만이는 계속 내 옆에 딱 붙어서 묻는다.     


 “몰라. 그냥 아무데나 앉으면 되지. 난 둘째 줄 중앙에 앉으련다. 이 정도가 적절하다.”

 “그럼 난 네 옆에 앉아야지.”

 “싫어! 왜 하필 내 옆이야!”

 “몰라. 그냥 좀 앉자!”     


 영만이는 절친이지만 나를 피곤하게 할 때가 많다.    

 

 “어? 유준이 너 4반이야? 대박! 나도 4반!”     

 나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라는 예쁜 외모에 성격도 좋아서 꽤 많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게다가 털털한 성격 덕분인지 여자애들에게도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덕분인지 나라는 우리 학교의 모든 소식을 다 아는 정보통이다. 나도 나름 우리 학교의 핵인싸라 자부하지만, 정보력에서는 나라를 이길 수는 없다.      


 “인사해. 내가 말한 유준이야.”     

 발 넓기로 유명한 나라가 이번에는 또 누구를 소개시켜 주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심장도 멎었다. 잊고 있던 그 천사의 목소리였다.   

  

 “어... 안녕. 반가워.”

 나답지 않게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인사를 했다.      


 “근데 자리 그냥 아무렇게나 앉는 건가? 라영아 우리 여기 앉을래?”

 “응. 좋아.”


 나라는 영만이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내 바로 뒤에 라영이가 앉았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 기쁜 예감도 틀리지 않았다. 하늘은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 라영이와 같은 반이 됐다. 나와 라영이가 2학년 4반이 됐다.     


 “유준이가 우리 반 1등이더라? 근데 너 수석 입학 아니었어? 작년 전체 전교 1등은 송미선이라던데.

 나라는 말이 많다. 첫 마디까지는 좋았는데... 라영이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신경 쓰인다.      

 “전교 1등 다시 찾아야지. 고등학교 끝나려면 아직 2년 남았잖아.”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첫 날부터 정말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내 뒤에 라영이가 앉아있다는 생각에 더 과장되게 공부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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