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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May 20. 2023

2화 - 빈 골대인 줄 알았는데 강력한 골키퍼가 있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1학년 때부터 전교에서 나름 탄탄한 지지를 얻고 있었던 나는 쉽게 반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외모에 성적, 그리고 축구 실력까지. 마치 공수주를 두루 갖춘 박지성처럼 나는 독보적이었고 다른 누구도 굳이 나와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에도 단독 입후보로 쉽게 반장이 되었고. 올해도 역시 반장 후보 추천을 받을 때 내 이름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후보 없어? 본인이 스스로를 추천해도 된다. 그래도 없어?”

 그냥 나 단일후보로 쉽게 끝내면 될 반정선거인데 담임은 괜히 뜸을 들였다.     

 

 “후보가 한 명이면 재미없으니까 담임도 한 명 추천할게. 나는 진효진을 추천한다. 불만 없지?”     

 담임이 강제로 후보를 2명으로 만들었다. 빈 골대에 쉽게 골을 넣으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진효진이 누구인가. 어쩔 수 없이 똑같은 걸 입어야 하는 교복과 체육복을 제외하고 가방부터 양말까지 모두 명품으로 휘감고 있는 여자애가 바로 진효진이다. 그래서 이런 걸 좋아하는 일부 여자애들이 효진이한테 달라붙고 있었고. 물론 나는 페라가모 로고를 농협 로고로 착각하고 농협에서 가방도 만드는구나 하고 있었지만.          

 반장 추천을 받은 다음 날 반장선거가 있었다. 담임이 효진이를 추천하긴 했지만, 난 자신 있었기에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등교했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와 보니 뭔가 어제와는 다른 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상하다?


 병달이는 다짜고짜 날 노려보더니 “넌 안 돼. 무조건 안 돼.”라며 썩은 미소를 던지고 갔다. 병달이야 원래 뭐 양아치니까 별로 신경 안 썼지만 현선이는 의식적으로 내 인사를 피하는 듯 했다. 대신 현선이는 교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애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 같았다.           


 행복한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영만이는 식당이 아닌 운동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장유준! 점심 먹을 시간 없어. 나랑 이야기 좀 해.”

 영만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밥도 못 먹게 하는데? 배고파 뒤지겠고만.”

 “너 반장하고 싶은 거 맞지?”

 “당연하지!?”

 “이대로 가면 너 반장 못 해. 오늘 현선이 하는 거 못 봤어?”

 “현선이가 뭐했는데? 반장 후보는 효진이잖아. 근데 현선이가 뭘 했어?”

 “으이그 순진한 놈아. 현선이가 효진이 선거운동 참모잖아.”

 “참모? 고작 고등학교 반장선거에 그런 것도 있어? 그래서 현선이가 뭘 줬는데?”

 “이거.”


 영만이가 보여준 건 문화상품권이었다. 그것도 무려 1만원. 1만원이면...와. 엄청 좋은데? 왜 나는 안 줬지? 아... 이게 아니지.     


 “현선이가 이걸 우리 반 애들한테 다 뿌린 거야?”

 “네 최측근인 나한테도 뿌린 거 보면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근데 애들이 겨우 이걸로 넘어간다고? 이거 때문에 날 안 뽑아?”

 “넌 가만 보면 정치 머리가 안 돌아가. 이게 끝이겠어? 이건 시작이지. 현선이가 이거 주면서 효진이가 반장되면 계속 돌린다고 하더라.”

 “와씨. 진짜? 너도 나 안 뽑으려고 했어?”

 “장유준! 정신 차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반장하고 싶으면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심지어 담임이 대놓고 효진이 밀어주고 있잖아.”


 시간이 별로 없다. 반장선거는 6교시 HR시간이다. 그래도 5교시가 다행히 수학이다. 어차피 수학천재인 나는 수학 수업은 안 들어도 되니까 대책을 세울 시간은 있다. 나는 체질상 밥과 후식은 꼭 먹어야 하니 점심 시간에는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 반장은 못하더라도 밥은 먹어야지. 엄마는 이런 나를 보며 독한 면이 없어서 전교 1등을 못한다고 했지만.   

       

 난 서둘러 전략을 수립했다. 사실 올해도 반장선거는 쉽게 생각했다. 전교 1등에서는 내려왔지만 반 1등은 유지하고 있고 난 아직 인기가 있다고 믿었다. 얼굴도, 축구 실력도 여전하니까. 반장 같은 건 쉽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고 반이 바뀌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나 스스로 내가 학교에서 유명하다고 생각했지만 날 잘 모르는 애들도 꽤 있었다.      


 영만이 말처럼 효진이가 내민 문화상품권 1만 원에 애들은 내가 아닌 효진이에게 표를 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반장이 누가 되는 건 애들에게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나보다 문화상품권을 주는 효진이가 애들 입장에서는 더 이득이다.    

  

 내 스스로 확신하는 표는 고작 3표에 불과했다. 정혁이, 영만이, 나라 정도. 규아만 해도 날 찍어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왜 내가 반장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어필할 수밖에 없다. 돈과 물질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내게 있음을 애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남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축구다. 사실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공부보다 축구로 훨씬 유명하다. 작년 체육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반을 우승으로 이끈 내 실력을 모르는 남자애들은 거의 없었다. 나의 날렵한 스피드와 축구장을 아우르는 넓은 시야는 경기를 지배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슛은 꼭 강하게 잘 필요가 없다. 빈 공간에 정확하게 차면 된다. 골키퍼는 절대 골대의 모든 공간을 다 막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걸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나, 장유준이다.      


 당연히 올해도 애들은 날 필요로 한다. 올해도 체육대회에 축구는 당연히 있으니까. 우리 반은 반드시 우승해야 하니까. 우리에게 체육대회 우승은 월드컵 우승에 맞먹으니까. 그리고 축구장에 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너무나 크니까.      


 여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외모다. 문화상품권보다 내 얼굴을 보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게다가 효진이는 명품을 많이 들고 다니는 특유의 허세로 일부 여자애들에게는 반감을 사고 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정혁이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 같다. 정혁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다. 얼굴은 나만큼 잘생기지 않았지만, 몸만큼은 우리 학교, 아니 최소한 우리 지역에서는 최고일 것 같다.     

 

 키는 이미 185가 넘었고, 난 태어나서 정혁이보다 어깨가 넓은 사람을 아직까지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니는 날마다 학원을 가지만, 정혁이는 날마다 헬스장에 간다. 나는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지만, 정혁이는 일요일에도 헬스장에 간다. 나는 전교 1등이었지만, 정혁이는 싸움 1등이다. 물론 정혁이가 진짜 싸운 건 딱 한 번 봤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정혁이는 싸움짱이다. 그 싸움을 보고 누구도 정혁이와 붙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정혁이는 불의를 못 참는다. 굳이 주먹을 쓰지 않고 가서 한마디만 한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죽는다.”

 이걸로 끝이다.   

  

 작년에 벌어졌던 엄청난 학폭 사태로 여자애들은 한동안 공포에 시달렸다. 학기 초 각기 다른 중학교에서 온 양아치들끼리 3대3 패싸움이 붙었고, 교실과 복도에는 피가 낭자했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학교에 출동했다. 복도에 있던 유리창은 다 박살이 났고, 한동안 피냄새가 학교에 진동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우리 모두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다. 나조차도 한 번씩 불안하니까. 이 공포를 없앨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하면 여자애들에게 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획기적인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 효진이는 반장선거 유세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현선이를 통해 애들에게 지속적인 문화상품권을 약속했다. 그걸 능가하는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내 용돈 사정상 효진이처럼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는 어렵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우리 반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엄마한테 말하면 내 서울대 진학을 위해 해줄 것도 같지만 구차하게 그런 방법으로 반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돈이 아닌 신박하고 재밌으며 흥미로운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     


 반장이 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느라 5교시 수학시간을 온전히 다 쓰고 나니 어느새 반장을 뽑는 6교시가 됐다.     


 “자, 말했던 대로 이번 시간에는 반장을 뽑을 거다. 먼저 효진이부터 나와서 한 마디 하도록.”     

 효진이가 앞으로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반장선거에 출마한 진효진입니다.

 저는 다른 후보인 유준이보다 공부를 더 잘하지는 않습니다. 얼굴도 유준이보다 덜 잘생겼죠.“

 효진이는 평소 이미지와는 다르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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