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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May 26. 2023

3화 - 어차피 인생은 늘 진검승부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하지만 유준이보다 더 많은 걸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2년 후면 우리의 인생의 많은 부분이 결정될 수도 있는 대학 진학이 결정되죠. 

 그렇기에 우리는 2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안 되죠. 최상의 조건이 갖춰져야 공부할 맛도 나고 성적도 오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그러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걸 생각해 냈고 저는 이걸 반장 공약으로 내세우려고 합니다.“     


 애들은 웅성웅성 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공짜로 베풀어주겠다는데 이걸 싫어할 사람은 없을 거다. 애들은 이미 문화상품권의 맛을 봤다. 그렇기에 효진이가 제시하는 그것이 어떤 것일지 매우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반장이 된다면 우리 반 교실에 얼음 정수기를 설치하겠습니다!”   

  

 정수기라고...? 기껏해야 몰래 문화상품권이나 돌리고 가끔씩 아이스크림이나 사주는 공약을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수기라니.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뛰어난 공약이었다.    

 

 “우리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다고 하죠. 그런데 학교 오면 어떤가요? 물 먹기 너무 힘들잖아요. 복도에 겨우 한 대 있는 정수기로는 우리 모두가 물을 충분히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은 피부 관리를 위해 꾸준한 수분 보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축구 끝나고 온 남자들은 저 멀리 복도 끝까지 가서 시원한 물도 안 나오는 정수기 앞에서 줄을 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 반에 정수기가 있으니까요. 제가 반장이 되면 시원한 물은 우리 가까이에 늘 있을 겁니다. 아, 요즘 정수기는 얼음도 나온다 하더라구요. 얼음까지 팡팡 나오는 정수기를 바로 여기, 우리 반에 설치하겠습니다!“    

 

 나조차도 설레고 있었다. 더운 여름이나 체육 시간 후에는 항상 시원한 물이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까지 복도에 있는 정수기에서 한 번도 냉수를 마셔보지 못했다. 정수기는 1반 앞 복도 쪽에 있는데 냉수가 채워지는 동시에 이미 1반 애들이 다 마셔버렸으니까. 내가 있는 4반과 정수기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집에서 물을 얼려서 학교에 가져오는 방법도 있다. 한 번 해봤지만 매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금방 다 빼앗겨 버렸다. 애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자리에 와서 얼음물 한방울이라도 먹으려고 난리였다. 그런데 우리 반에 정수기라니... 우리 반 전용 정수기라면 하루 종일 충분히 냉수를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조차도 꿈에 부풀었다.      


 “우리 반에 정수기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제가 미리 담임선생님과 학교 측에 확인했고,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제가 반장이 된다면 냉수와 얼음이 펑펑 나오는 정수기와 함께 열심히 공부하는 2학년 4반을 만들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효진이의 연설이 끝났다. 반장 후보 추천을 받을 때만 해도 효진이는 반장에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효진이는 담임의 든든한 지지 아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효진이가 문화상품권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용쓴다는 생각만 했지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인지도, 성적, 얼굴 모든 면에서 내가 효진이를 앞섰으니까. 하지만 유일하게 효진이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돈이었다. 효진이는 그걸 알고 정확히 그 부분을 공략한 것이다.


 나조차도 들으면서 혹한 공약이라니... 효진이는 생각보다 영특했다. 동시에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부모님을 가진 효진이가 부럽기도 했다.   

       

 이제 내 차례다. 이렇게 쉽게 패배할 수 없다. 5교시 수학 수업을 포기하고 수립한 전략으로 표를 다시 내 쪽으로 가져와야 한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교탁 앞에 섰다.     


 “여러분!”

 난 일부러 잠시 틈을 두었다. 친구들은 그 찰나의 순간에 더 집중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제가 미남입니까?”      

 말도 안 되는 말을 던져봤다. 말도 안 되는 것까진 아니다. 내가 잘생기긴 했으니까. 여자애들의 절반은 피식 웃었고, 다른 절반은 크게 웃었다. 남자애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작은 목소리라기에는 내 귀에까지 들리는 욕을 던진 병달이만 빼고.     


 “사실 저는 제 얼굴을 많이 믿었습니다. 이 정도 생겼으면 인기가 많겠지, 당연히 반장이 되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여전히 뻔뻔하게 던진 내 말에 여자애들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절친 정혁이마저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들 역시 내게 집중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맞아요. 성적이 많이 내려왔습니다. 수석 입학이라는 떠들썩했던 타이틀은 제 곁에서 사라진지 오래됐어요. 하지만 키와 얼굴은 올라왔어요. 키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고, 얼굴은 더 올라갈 곳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 미세한 틈을 뚫고 계속 올라가더라구요.”     

 이제 뻔뻔함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됐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애들의 표정에는 더 이상 변화가 없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효진이와 같은 공약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교실에 정수기를 설치해 줄 수도 없고, 햄버거를 쏠 수도 없습니다. 저희 집은 매우 평범하거든요. 제 용돈은 빈곤한 수준이구요.”     

 애들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특히 맨 앞자리에 앉은 미래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래도 딱 두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안전한 반을 만들겠습니다. 작년에 일어났던 학폭 사태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명이 우리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 모두는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아, 정혁이는 제외하구요.”     

 정혁이가 피식 웃으며 나와 눈을 맞춰줬다.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이 시절을 즐겨야 하는 18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고 살아야 합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 힘이 더 세다는 것이, 공부를 더 잘한다는 것이 우월감을 부여해 주지는 않습니다. 공포가 가득한 학교에 날마다 등교하는 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입니까? 내일 다시 피가 범벅이 된 복도를 밟아야 할 수도 있는데 밤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까요?     

 제 첫 번째 약속은 안전한 반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편안하게 반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우리 반에서는 그 어떤 가해자도,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공부는 하기 싫어도 교실에는 오고 싶은 그런 반을 만들겠습니다,”     


 강력한 의지를 담아 첫 번째 공약을 발표했다. 작년 패싸움으로 얼룩졌던 학폭 사태를 떠올린 애들에게 이런 약속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혁이를 절친으로 둔 나조차도 그 사태 이후로 한동안 학교 오는 것이 괴로웠으니까. 언제, 누가 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실로 끔찍했으니까. 차라리 한 대 맞고 병원에 누워있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마저 했으니까.    

 

 “왜 그런 아침 있잖아요. 나 오늘 좀 학교 가고 싶은데? 하는! 그게 매일이 되는 거예요.”    

 

 배우 박보검의 침대 광고를 패러디 한 회심의 문구를 던졌다. 여자애들 몇 명이 열심히 웃어줬다. 하지만 나머지는 기대보다 반응이 없었다. 박보검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말만 해도 잘생긴 얼굴 덕분에 다른 여자들이 웃는다고 했는데 내 얼굴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보다.     


 “아, 물론 이건 제가 정혁이랑 친하니까 감히 약속드릴 수 있는 겁니다.”     

 이번에는 애들도, 정혁이도 웃었다. 엄숙했던 분위기가 살짝 밝아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축구는 정말 소중합니다. 그렇죠?”

 많은 남자들이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학교 남자애들은 정말 축구에 미쳐 있다. 축구를 모르면 남자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다. 성적으로 다른 반에게 지는 건 용납할 수 있지만, 축구로 다른 반에게 지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적어도 남자들에게는 말이다.      


 “체육대회에서 축구 우승이라는 건 월드컵 우승에 비견될 만한 영광스러운 일이죠. 작년 체육대회에서 제가 속했던 3반이 우승했다는 건 잘 알고 계시죠? 결승전에서 제 결승골로 1대0으로 이겼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전 올해도 우리 반을 축구 최강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한 우리 반은 반드시 우승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우승은 제가 반장이 되어야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반장이 못되면 치명적인 정신적 부상을 입을 것 같습니다. 좌절감과 슬픔에 두 발이 제대로 안 움직일 것만 같군요. ”   

  

 사실 이 공약은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치사한 것 같긴 했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반장을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하는 수밖에. 효진이도 가진 돈을 다 붓고 있으니 나도 내가 가진 걸 다 쏟아내야 한다. 축구에 진심인 남자애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뽑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약속은 이겁니다. 근데 이건 담임선생님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데... 아마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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