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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Jun 02. 2023

4화 - Gum Terror가 발생하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가만히 듣고 있는 담임은 본인 이야기가 나오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본인은 무조건 효진이 편인데 내 말을 들어줄 리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공개적으로 말을 해줘야 한다. 담임이 거절할 수 없도록 말이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 모두 만족하십니까?”

 몇 명은 고개를 살짝 저었지만, 아무도 소리 내서 대답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학기 초에 아무 자리에나 앉았고 일주일에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리에 매우 불만이 많습니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 영만이 옆이라뇨!”     

 이 말에 라영이마저 웃었지만 영만이는 씩씩대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쩔 수 없다. 이따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면 금방 풀릴 영만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제안합니다. 자리를 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민주적이며, 모두가 불만을 가지지 않을 방법을 제안합니다.”     

 자리에 불만이 있어 보였던 애들을 중심으로 내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여 왔다.     


 “자리를 정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달, 3월에는 여자들이 먼저 원하는 자리를 골라서 앉습니다. 여자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나면 남자들이 이제 원하는 짝꿍 옆자리에 앉는 겁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4월에는 반대로 합니다. 남자들이 먼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여자들이 원하는 짝꿍을 골라 앉는 거죠.”     


 애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키 순서대로, 번호 순서대로만 앉아 오던 애들에게 나름 신선하고 충격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네, 맞아요. 전 영만이 옆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미치도록. 저도 여자 짝꿍과 앉고 싶습니다.”     

 나라는 책상을 치며 깔깔깔 웃었다. 가라앉고 있던 영만이의 얼굴에 다시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자리와 짝꿍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이 방법. 제가 반장이 된다면 꼭 시행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충분히 허락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연설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반장이 되었다. 


 ***

         

 “아악!”


 비명소리가 전교에 울려 퍼졌다. 1반에서 이번 주말 축구시합 일정을 이야기 하고 있었던 나는 바로 복도로 뛰쳐나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소란스러운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처음에는 3반인 줄 알았는데 우리 반이었다.  

   

 “누구야! X발! 걸리면 진짜 죽여 버릴 줄 알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효진이었다. 어찌된 상황인지는 굳이 효진이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음악 실기 시험을 위해 가져온 효진이의 바이올린에는 씹다가 버린 껌이 덕지덕지 묻혀있었다. 껌 한 개가 아니라 바이올린 전체에 껌이 가득 붙어있었다.     

 

 바이올린은 커서 사물함에 안 들어가니 효진이가 케이스에 담아 책상 옆에 놓아두고 있었다.  그러다 이 봉변을 당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고의로 한 짓이 분명했고, 그건 여기에 있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효진이는 피해자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선뜻 효진이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친구가 다가가 토닥여주거나 같이 욕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반장 선거서 이후로 효진이는 절친이 없었다. 더 이상 문화상품권을 주지 않으니 현선이마저도 효진이와 같이 다니지 않았다.    

 

 사실 이건 효진이가 자초한 면이 크다. 음료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가 돈을 엄청 잘 번다며 틈만 나면 자랑을 했다. 뭐 거기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효진이는 정작 돈을 쓰지 않았다. 반장선거 전에 문화상품권을 돌린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영만이 말로는 반장선거에서 떨어진 후로는 아예 베푸는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대신 자신의 악세서리나 물건은 엄청 자랑했다. 혹시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효진이 곁에 있던 마지막 속물인 규아마저도 효진이를 떠나고 나니 효진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단이 났는데 누구 하나 효진이를 위로해주기는커녕 뒷짐을 지고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중 많은 애들은 쌤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런 맘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난 반장이다. 효진이는 하필 내 반이고, 내 반에서 사건이 터졌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매우 참혹하다. 살인 같은 1급 범죄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고등학교에서 이 정도 사건은 1급 사건에 해당한다.         

 

 자세히 다가가서 살펴본 바이올린은 끔찍했다. 미국인가 유럽에서 자기 아버지가 직접 사왔다며 효진이가 열심히 자랑했던 바이올린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얼핏 봐도 풍선껌이 최소 20개는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냥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붙여서 늘어뜨려 놓았다. 바이올린은 핑크빛 풍선껌으로 얼룩져 있었다.     


 범인은 1명일까 여러 명일까. 아니다. 그 전에 효진이의 원한 관계부터 조사해 봐야지. 근데 효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 물론 그렇다고 효진이를 모두 싫어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용의자를 좁히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우리학교 학생 모두가 용의자가 될 수 있다.   

        

 딩.동.댕.동.     


 6교시가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다들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효진이는 바이올린을 붙잡고 계속 울고 있다. 6교시는 담임 수업 시간인데... 효진이는 종이 울리고 나니 더 크게 울고 있다.  일부러 담임이 들으라고 우는 것만 같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반장 뭐하냐!”

 “차..렷!”

 “뭐야? 효진이는 왜 울고 있어? 바이올린은 또 왜 그래?”     


 처참하게 변해버린 효진이의 바이올린을 발견한 담임은 인사를 받는 것도 생략한 채 우리에게 호통을 쳤다.     

 “사건이 매우 심각하다. 교사 경력 20년 동안 이런 사건은 처음 본다. 이번 시간 수업은 없다. 모두 눈 감아라.”     


 담임의 의미 없는 형사 놀이가 시작됐다. 범인이라고 자수할 놈이 바이올린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범인이 반드시 우리 반에 있다는 보장도 없다. 효진이에게 원한을 품은 친구들은 다른 반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   

  

 예상대로 아무 소득 없이 수업은 끝났다. 담임은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선처해주겠다며 우리에게 눈을 감고 범인은 손을 들라고 했지만 교실은 고요할 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반 애들 중 누구도 효진이를 도와줄 마음은 없다는 걸. 


 하지만 난 반장이니까 이 사건에 어느 정도 책임은 느낀다. 게다가 난 추리소설 매니아기도 하고.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겠다.     


 “현선아! 효진이가 오늘 바이올린 가져온 거 맞지?”

 “응. 확실해. 내가 아침에 효진이랑 같은 버스를 탔거든. 바이올린 들고 있는 거 보고 효진이도 참 한결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꼴랑 10점 받으려고 무슨 바이올린까지 들고 오냐고.”     


 남자들은 대부분 리코더를 가져왔다. 그나마도 귀찮아서 친구 리코더를 빌려서 실기를 보겠다는 남자애들도 한트럭이었다. 여자들은 보통 음악실에 있는 피아노 아니면 리코더를 선택했다. 그런데 고작 수행평가 10점짜리 실기에 바이올린을 들고 온 애는 내가 알기로 전교에서 효진이밖에 없었다.  

    

 현선이는 반장선거 이후 효진이에게 버려지고 나서 효진이를 극도로 싫어한다. 현선이의 철새 같은 성격 때문에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선이의 정보력과 추리력이 때로는 필요할 때가 있다. 얼마 전 현선이가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이라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추리 마니아들끼리 실컷 수다를 떨었었는데, 진짜 추리를 같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 바이올린에 껌을 뱉을 수 있는 기회가 오늘 아침부터 5교시까지 라는 거잖아?”

 “그렇지. 효진이가 6교시 시작 직전에 소리를 질렀으니까.”

 “쉬는 시간에는 애들이 교실에 있으니까 불가능할 것 같고. 점심은 반마다 순차적으로 먹으니까 점심 시간에도 복도를 돌아다니는 애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애들 눈을 피해가면서 저렇게 껌을 붙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렇지. 그렇다면 대체 언제 껌을 붙일 수 있었을까...”     


 현선이는 분명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는 듯이 한참을 생각했다.    

 

 “잠깐만... 와! 대박! 우리 2교시에 체육이었잖아! 체육 시간에는 우리 반 교실에 아무도 없잖아! 다른 반 애들은 수업 듣고 있으니까 복도에도 아무도 없고! 그렇다는 건 체육시간에 범행이 가능하다는 거지! ”     


 현선이의 추리력은 날 앞서 갔다. 범행시간은 2교시 체육시간으로 압축됐다. 용의자도 우리반 학생으로 좁혀졌다. 다른 반 누군가가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범행이 저지르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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