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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Jul 14. 2023

12화 - 드디어 첫 번째 짝꿍을 정하는 날이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오늘은 자리와 짝꿍을 바꾸는 날이다. 반장이 내세운 공약을 담임인 내가 실현시켜 주는 거야. 알지? 각자 짐은 모두 사물함에 다 집어넣었을 테니 이제 모두 교실 뒤로 이동!”


 담임의 뻔뻔한 생색내기와 함께 우리는 모두 교실 뒤로 이동했다. 내가 제안한 것이지만 막상 진짜 하려니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럼 이번 3월은 여자들이 먼저 원하는 자리에 앉도록 하자. 자리 정해지고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냉큼 가서 앉도록 해! 이제 출발!”


 출발 소리와 함께 서둘러 출발할 거라 생각했지만 여자애들은 머뭇머뭇거렸다. 그러다 한 명이 출발하자 뒤이어 다른 여자애들의 이동이 시작됐다. 나는 최대 관심사인 라영이가 어디로 가는지만 보고 있었다. 라영이는 창가 쪽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는 칠판이 잘 안 보여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 옆에 앉을래?”


 미래가 웃으면서 내게 말을 툭 던지고 간다. 미래의 자리는 교실 한가운데 가장 앞자리다. 교탁 바로 앞이라 선생님의 무수한 침 세례를 받아야 하지만, 공부하기에는 가장 좋은 자리다. 선생님 수업을 다른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집중하며 들을 수 있다.


 사실 라영이 옆자리는 아직 부담스럽다. 나라와 영만이랑 있을 때는 그래도 대화가 됐지만 라영이와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건 아직 자신이 없다. 라영이가 내게 특별히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라영이는 나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여자들 다 앉았지? 이제 남자들 차례다. 하나, 둘, 셋 하면 출발해라. 어허! 임병달! 아직 하나도 안 셌다. 하나, 둘, 셋!”


 담임의 신호가 떨어졌지만 남자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임병달 니 놈 한 명만 제외하고. 병달이는 가장 먼저 복도 쪽 맨 뒷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현정이의 표정이 굳어져 간다. 그 자리는 원래 병달이가 예전부터 찜해둔 자리인데... 그 자리가 딴짓하기 가장 좋은 자리니까. 수업이 끝나면 가장 먼저 교실을 나갈 수 있는 자리니까. 하지만 우리 반에서 현정이만 그걸 몰랐나 보다. 이렇게 병달이와 현정이가 우리 반의 첫 번째 짝꿍이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남자들은 눈치게임이라도 하듯이 아무도 선뜻 출발할지 못하고 있다. 가장 뒷자리가 앉기는 가장 편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 바로 앞이니까. 그냥 앉으면 된다. 하지만 다른 자리는 다르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 발걸음 하나하나를 모두가 지켜볼 것이다.


 내가 제시한 공약이고 매우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플레이어가 되니 쉽게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 가자!’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일부러 라영이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것이 맞다. 아직 다른 남자애들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서 내가 어디든 쉽게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왔어.”

 “반가워. 잘해보자.”


 미래 옆에 앉았다. 내가 이왕 자리를 선택할 거라면 나를 불러주는 사람 옆에 앉고 싶었다. 환영받는 곳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아, 이모탕수육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는 절대 아니다.


 학기가 시작하고 미래와는 말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효진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심지어 정말 오랜만에 눈맞춤 세계까지 들어가 보기도 했고.


 차갑게만 보였던 미래는 진지함 속에서도 발랄한 유쾌함과 번뜩이는 날카로움도 가지고 있었다. 내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둥 가끔씩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미래의 집이 보여주는 부유함에 살짝 기죽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는 학교다. 그리고 미래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내 선택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남자애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의자먼저 앉기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본인이 먼저 엉덩이를 넣었다고 싸우는 애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낼 자리 배치가 완성됐다.


 ‘영만이? 그나마 다행인가?’


 라영이 옆에는 영만이가 앉았다. 영만이는 나라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하긴 나도 미래를 좋아해서 앉은 건 아니니까. 마음과 다르게 앉을 가능성이 많지. 영만이는 마음이 쉽게 바뀌기도 하고. 오히려 다행이다. 절친인 영만이를 통해서 라영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자리 하나 바꿨을 뿐인데 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남자들끼리 앉아서 수업시간에도 장난치기 바빴던 애들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좋아하는 여자애 옆에 못 앉아서 그 여자애 자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애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처럼 말이다.


 난 맨 앞자리에 앉은 관계로 다른 자리를 쳐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자리를 보려면 몸을 완전히 돌려야 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몸을 굳이 돌리는 건 누가 봐도 어색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척하면서라도 봐볼까 했는데... 역시 무리였다.


 “짝꿍 맘에 드냐?”

 자리를 바꾼 뒤로 부쩍 표정이 좋아진 영만이를 보면서 난 슬쩍 물어봤다.


 “내 옆에 앉아있을 때랑 표정이 너무 다르잖아! 주영만이 이 새끼!”

 “당연히 니보다 좋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분명 순진해서 속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영만이 인데... 어느 순간부터 영만이의 진심을 모르겠다. 영만이가 진짜 라영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라영이를 잘 못 본다는 것만 빼면 내 자리는 최고의 자리였다. 교실 한가운데 맨 앞자리는 상징성이 있는 자리다. 사실 대부분은 그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선생님하고 가장 가까운 자리라서 졸거나 딴짓을 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공부하기 가장 좋은 자리다. 선생님과 제대로 눈을 맞추고 졸지 않으면서 수업에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는 미래가 있다. 수업 시간만 되면 미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얼마나 수업을 열심히 듣는지... 내가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미래만 보면서 수업하고 싶을 것 같다.


 미래와 짝꿍이 되고 나서 다시 본 미래는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차가워 보였던 첫인상은 날카롭고 지적인 인상으로 바뀌었고, 키가 다른 여자애들보다 조금 크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제 미래는 거의 모델 수준이었다. 다리는 나보다 더 긴 것 같고 얼굴은 나보다 더 작은 것 같았다. 키도 나랑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고.  


 반 1등은 당연히 지키고 전교 1등을 노려야지 하는 생각은 매우 안일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바로 아래에 있는 미래가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열심히 한다. 집에 가서 얼마나 더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학교에서만큼은 우리 반에서 가장 열심이다. 아니다. 미래보다 더 열심히 하는 진짜 독한 놈이 한 명 있는데 그 애는 내 관심 밖이니 나중에 이야기하자.


 ***


 미래 부모님에 관해 알게 된 것은 미래와 짝꿍이 되고 나서 며칠 뒤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 미래가 갑자기 조퇴를 한다고 하길래 물어봤다.


 “조퇴? 갑자기 왜? 뭔 일 있어?”

 “이모가... 다치셨대.”

 “뭐? 그 탕수육 이모가?”


 인자한 미소로 내게 환상적인 탕수육을 주시던 이모의 모습이 내 머리를 스쳤고, 난 정말 걱정이 돼서 다급하게 물어봤다.


 “진짜? 왜? 많이 다치셨어?”

 “교통사고를 당하셨대. 아빠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해서 얼른 가보려고.”

 “괜찮으셔야 할 텐데... 얼른 가봐. 이모 상태가 어떤지 이따 나한테도 꼭 알려줘.”


 그날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미래에게 연락이 왔다. 다행히 이모가 다친 곳이 중요 부위를 비껴가서 간단한 수술을 잘 끝내고 회복실에 계신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제는 조금 마음 편히 잘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인생 탕수육을 다시 못 먹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마음 편하게 자려고 눈을 감았을 때 갑자기 학교에서 미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해서...’


 아빠 병원이라... 응급 환자를 수술할 정도면 작은 규모의 병원은 아닐 텐데... 아빠 병원이라고 하면 미래의 아버지가 의사인 건가..? 며칠 전에 봤던 미래의 아파트가 떠오르면서 미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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