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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Jul 12. 2023

11화 – 가을빛이 흩날리는 밤이었습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미치도록 외치고 싶었던 갓장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범인을 알고도 말하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장유준이라는 새로운 명탐정의 데뷔가 미뤄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자꾸 생각이 났고, 교실에서 효진이를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정혁이와 약속했다. 지금 이렇게 무너져 있는 효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혁이와 정혁이 부모님 모두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효진이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효진이는 더 이상 이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최대한 빨리 이 사건을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혁이는 내게 다시 한번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사건을 벌인 효진이가 무섭기도 하고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혁이로부터 효진이 사정을 듣고 나니 효진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반장선거에서 내게 패한 것도 분명 조금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효진이는 관심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에 가면 부모님은 효진이에게 신경 써주지 않고, 외동이라 의지할 곳도 없고... 학교에 와도 친구가 거의 없다 보니 고민하다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역으로 진짜 친한 친구가 있었더라면 이런 방법을 분명 말렸을 텐데... 효진이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정혁이와 정혁이 부모님의 죄책감도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혁이 가족 입장에서는 너무 챙겨주고 물어보면 효진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갑자기 바뀐 상황에 효진이가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최대한 도와주려고 효진이와 살짝 거리를 두고 지냈던 것인데... 결국 이런 사건을 만들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에 의해 잊히고 지나간 사건은 새로운 사건에 의해 잊힌다.     

 

  학교는 금방 평화로워졌다. 효진이의 바이올린 사건은 충격적이었지만, 생각보다 애들은 효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효진이보다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유럽산 바이올린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해야 할까.   

   

 효진이 사건을 잊기 위해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건은 터졌다. 병달이를 필두로 한 우리 학교 남자 양아치들 몇 명이 옆 학교 양아치들과 패싸움을 벌인 것이었다. 남자 10명이 넘게 모여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찰이 출동했다.      


 모두가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데다가 부모와 학교 모두 조용히 사건을 종결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다음 날 교실에 온 병달이의 왼쪽 눈두덩이는 붕대를 붙여뒀지만 피멍으로 퉁퉁 부어있는 것이 쉽게 보일 정도였다. 양아치들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다치고 아파서 힘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학교가 조용했다. 효진이 사건은 당연히 그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라영이를 처음 본 건 작년 수련회 때였다.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다. 하지만 오후부터 비가 쏟아졌고 결국 우리는 강당에 모였다. 모두의 예상대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줬다. 우린 몽당촛불을 들고 교감선생님의 지루한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 마지막 한 말씀에서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서 갑자기 장엄한 음악이 깔렸다.      


 그 음악 속에서 매우 다소곳한 분위기의 여자애가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은 그 여자애가 시를 한 편 낭송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자리에서 시를 낭송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내 자리에서는 무대까지 거리가 있어서 그 여자애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평범해 보였던 그 여자애의 뒷모습에 흥미를 잃었던 나는 그 애가 뒤를 돌아 정면을 향한 채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까부터 해오던 축구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을빛이 흩날리는 밤이었습니다.”     


 그 여자애가 들려준 첫 목소리는 내 모든 감각을 멈추게 했다. 변성기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나는 내 목소리가 미성이라 자부하며 살았는데, 그 여자애의 목소리는 내 미성 따위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세상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교감의 지루한 훈화로 웅성웅성 대던 다른 친구들도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공간을 지배했다. 더없이 맑았지만 깊이가 있었다. 축구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목소리만이 내 정신을 가득 채웠다.     


 내 모든 감각을 지배했던 시 낭송이 끝나고 그 여자애가 무대를 내려가자마자 나는 그 여자애를 쫓아갔지만 이미 그 여자애는 여학생들 무리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라와 마주쳤다.      

 나라는 내 절친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 나보다 발이 넓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고.      


 “나라야! 아까 그 애 누구야?”

 “갑자기 보자마자 뭐래? 누구 말하는 거야?”

 “아까 그 시 낭송하던 천사.”

 “아 김라영? 근데 뭐? 천사?”

 “그 천사는 몇 반이야?”

 “1반.”

 “1반? 근데 내가 왜 몰랐지? 나 1반 엄청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라영이가 조용한 스타일이긴 하지. 얼굴이 막 예쁜 것도 아니잖아.”   

  

 나라가 이따 밤에 뭐 할 거냐고 물었던 것 같았지만 나라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김.라.영. 그저 그 세 글자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라영이가 지금 내 뒤에 앉아있다. 내 사교성은 전교에서 유명한데도, 라영이 앞에서는 그저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래도 라영이 옆에 앉은 나라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준 덕분에 영만이까지 우리 넷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말한 공약으로 새롭게 자리를 정하기 전까지 고작 며칠뿐이었지만 말이다.     


 라영이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굳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겨우 알아낸 것이 사는 동네와 형제 관계 정도다.        

   

 라영이와 사귄다는 생각은 못해봤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 엄마는 예전부터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나를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아닌 남학교로 보내려고 이사까지 하려고 했을 정도다. 내가 이 학교로 배정됐을 때부터 엄마는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말했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 여자친구는 절대 안 된다고.      


 고1 성적은 엄마가 맞았음을 증명했다.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던 남중을 다니며 늘 2등만 했던 내 성적은 중학교 최종 합산으로는 1등이었다. 하지만 그 1등이라는 성적은 지난 고등학교 1년 동안 한 번도 다시 내게 오지 않았다. 늘 2등만 하던 시절이 그리울 만큼 반 1등을 겨우 지켜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원인이 남녀공학을 다녀서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엄마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다고 강조했다.   

  

 엄마는 진지하게 전학을 권유했다. 내가 한 학기만 더 기회를 달라고 겨우 사정해서 이 학교에 남아 있다. 사실 전학이 두려운 건 아니다. 내 사교성이면 금방 친구도 만들 수 있고. 고등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다만 라영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라영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라영이랑 말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이 학교를 떠나는 건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남자들만 있는 학교로 가는 건 진짜 못할 것 같다.     

     

 엄마와의 약속과 라영이가 내 뒤에 앉아있다는 사실 덕분에 3월 첫 주 공부는 매우 잘됐다. 쉬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했다. 뒤를 돌면 라영이가 있었으니까. 물론 내 방광이 자주 방해하긴 했다. 난 2교시에 한 번은 꼭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봐야 한다. 라영이랑 이야기 더 하려고 한 번 참았다고 3교시에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한 번씩 몸을 비비 꼬는 나를 보며 라영이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끔찍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내가 반장 공약으로 제시한 자리 바꾸기를 하는 날이 왔으니까. 라영이와 더 이상 앞뒤로 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이런 공약을 만들었다는 후회도 살짝 했다. 하지만 의외로 담임은 이 공약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줬다.      


 3월은 자리 바꾸기를 하는 첫 달이다. 이번 달에는 여자가 원하는 자리에 먼저 앉고, 남자가 원하는 여자 옆에서 앉는 방식이다.     


 두근두근. 떨림과 긴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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