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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Jul 20. 2023

14화 - 아우라는 키에서 시작된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보통 영상 같은 거 볼 때 집중하느라고 눈을 잘 안 깜빡이는 경우가 많아. 그러면 눈이 더 건조해질 수밖에 없지. 본인도 모르게 눈이 메말라 가는 거야. 인공눈물 줄 테니까 그거 종종 넣어주고 눈을 자주 깜빡이도록 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90도로 인사를 드렸다.     


 “아빠 눈에 좋은 약이나 먹는 거 이런 건 없어?”

 “지금 너희 때는 그냥 다 잘 먹으면 돼.”     


 미래 아버지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자꾸 나를 경계하는 것 같다. 기분 탓인가... 이런 대형 병원 원장님에게 견제받는 나란 인간은 대체... 훗.     


 “우리 딸 얼굴 보니까 좋네! 전부터 놀러 오라고 할 때는 한 번을 안 오더니... 너!”

 인자했던 병원장님의 얼굴이 험악해지려고 한다.     


 “자! 가면서 맛있는 거 먹어! 아빠는 회의 있어서 가봐야 되니까 이따 집에서 보자!”

 병원장님은 서둘러 나가셨고 미래의 손에는 5만 원 2장이 놓여 있었다.


 맛있는 걸 사 먹는데 10만 원이나 주시다니... 이 낯선 상황에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생각 나? 예전에 우리 맨 처음 이모 탕수육 먹었을 때?”

 “응. 당연히 생각나지. 그 탕수육이 어떤 탕수육인데. 근데 갑자기 그때는 왜?”

 “내가 그때 너한테 소원으로 뭘 말했는지도 기억나?”

 “네가 내 얼굴을 차분하게 보고 싶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아빠는 안과 의사여서 직업병처럼 사람들 눈을 먼저 보거든. 나도 아빠한테 영향을 받아서 그 사람 눈을 먼저 쳐다봐. 근데 생각해 보니 내가 네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더라고. 별로 안 친해서 너랑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잖아. 너랑 이야기하다 보니 네가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에 들어서 그때 그런 소원을 말한 거야. 네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네 눈을 먼저 보고 있었지.”

 “그런 거였구나. 그런 소원을 말하는 애는 네가 처음이라 그때 조금 당황스럽긴 했었는데 이유가 있었네.”     

 그렇다. 미래의 특별한 습관과 소원 덕분에 그날 미래와 눈맞춤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준아! 너랑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돼. 나 안 데려다줘도 되니까 내일 학교에서 보자.”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미래는 내게 안녕을 고한다.     


 “그래도 오늘 나 때문에 너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솔직히 그 10만 원을 보고 이모 탕수육이 생각났다. 완전 설렜었는데... 미래는 먹튀를 할 생각인 것 같다.     

 “미안. 기사님이 와 계시거든. 내일 보자!”

 미래도 서둘러 사라졌다. 부녀가 모두 참으로 빠르군.     


 ***     


 하지만 그 10만 원이 먹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 뒤인 토요일 저녁, 미래는 내게 집 앞으로 잠깐 나오라고 했다.     


 “자! 짝꿍에게 주는 선물!”     


 미래는 내게 3박스를 건넸다. 하나는 루테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나머지 2박스는 점안액이라 적혀 있었다.     

 “이건 먹고. 이건 뿌리고. 이 정도는 알지? 나 간다!”

 이번에도 미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듣고 가야지...       

   

 플라시보 효과라고 했던가. 루테인이라는 약을 먹는 것만으로도 눈이 촉촉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에 인공눈물 한 방울 뿌려주면 남들 못지않은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눈싸움에 대한 비밀을 다시 한번 탐구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눈을 오래 뜨고 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눈맞춤 세계에 한 번 더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와 함께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까... 눈맞춤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 봤다. 엄마랑은 냉전 시기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빠랑 눈맞춤을 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나마 동생은 시도해 볼 수 있으나 아직 너무 어려서 재미가 없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초등학교 5학년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없다.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래였다. 미래는 지금 내 짝꿍이고, 최근에 꽤 자주 만났다. 심지어 눈맞춤에 한 번 성공하기까지 했다.      


 물론 위험성도 있다. 똑똑한 미래에게 내 어색한 시도를 들킨다면 난감해진다. 미래에게 눈맞춤 세계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기도 애매하다. 미래가 알게 될 경우 어떤 돌발 행동을 하게 될지 모른다.    

  


 키라는 것이 참 무섭고도 중요하다.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는 더 그렇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보이는 것이 얼굴과 키 아니던가. 게다가 키는 완성되는데 시간제한이 있다. 스무 살이 되면 더 이상 키가 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스무 살 이후에도 얼굴은 성형이나 노력으로 바꿀 수 있고, 학력은 다시 공부해서 올릴 수 있지만 키는 그렇지 않다. 물론 키가 커지는 수술도 있다고는 하던데 내 뼈를 잘라가면서까지 키가 크고 싶진 않다. 엄살이 심한 내가 뼈를 자르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 키는 늘 평균 근처를 맴돌았다. 물론 얼굴이 되니까 여자들에게 인기는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오니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초등학교 때는 남자가 키 좀 작아도 그냥 다들 그런가 보다 했다. 원래 그 시기에는 여자들이 더 크고 남자들이 더 작은 것이 당연하니까. 중학교 때는 남학교다 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균은 되니까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오니 키가 매우 유의미한 변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소위 키빨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 키라는 요소는 여자들이 설레는 포인트에 매우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벌써 18살이다. 이제 정말 키가 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맞춤도 중요하지만 키가 크는 건 더 중요하다. 눈맞춤은 언제라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지만 키는 아니다.   

   

 내 키는 지금 175 정도 되는 것 같다. 174라고 하는 미래 옆에 섰을 때 그래도 내가 살짝 더 크다. 정말 평균에 걸쳐있다. 키가 평균이지만 얼굴이 잘생겼으니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매우 생각이 짧았다. 나는 왜 최고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커질 생각을 왜 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생각이 든 건 미래 아빠를 뵙고 나서였다. 미래 아빠 키는 대충 봐도 185는 되어 보였다. 미래가 키가 큰 이유가 충분히 납득될 정도의 키였다. 미래 아빠는 병원장이라는 권력과 능력, 최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부유함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우월한 남자다. 그런데  키까지 크다 보니 그 위압감이 실로 대단했다. 아.우.라. 이 단어를 이런 곳에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래 옆에 미래 아빠가 섰을 때와 내가 섰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것도 느꼈다. 미래는 지금 너무 내 눈높이에 있다. 미래보다 한참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 바로 옆에 키가 정말 큰 애가 있다. 바로 유정혁. 키가 벌써 187이다. 거기에 어깨는 정말 한없이 넓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서 감히 정혁이에게 덤빌 사람이 없는 거겠지. 싸움에서 기술도 중요하지만, 체급은 절대적이다.     


 하루는 정혁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혁아, 뭘 먹으면 그렇게 키가 크냐? 어렸을 때부터 우유를 엄청 먹었나?”

 “아니, 별로 안 먹었는데.”

 “그러면 키 크려는 노력 따로 한 건 없어?”

 “응.”

 “그래? 그러면 혹시 아버지는 키가 몇이셔?”

 “190.”

 “어머니는?”

 “175.”

 “혹시 부모님이 운동선수 출신이시니?”

 “아니. 그냥 일반인이셔.”

 “친가 사람들 다 커?”

 “어. 명절에 모이면 내 키는 평균이야. 아직 아빠보다도 작은데.”    

 

 더 이상 정혁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유전자란 무엇인가...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내겐 키가 클 수 있는 2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있다. 정혁이처럼 키 큰 집안에서 키 큰 사람이 나올 확률은 매우 높다. 그렇다고 해서 평균 키를 가진 우리 집안에서 키 큰 사람이 안 나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 내 키가 평균은 된다. 조금만 더 노력해서 딱 10cm만 더 컸으면 좋겠다.  

   

 우유를 마시고, 농구와 줄넘기를 열심히 하고 보약을 먹어도... 정혁이보다 키가 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클 수 있는 최대한의 키를 달성하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중요한데... 이게 어렵다.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자.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엄청 중요하다는데 잠 잘 것 다 자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      


 대학교는 재수해서 더 좋은 곳으로 다시 갈 수 있지만 키는 20살이 되면 더 이상 바꿀 수 없으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본다. 키가 내 목표인 185가 되는 그날까지.     


 ***     


 “야! 이거 왜 너 혼자 보냐! 내놔! 나도 좀 보게!”

 오래간만에 찾아온 조용한 자습 시간의 평화를 깨뜨리는 건 병달이었다. 패싸움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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