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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04. 2023

19화 - 엄마의 잔소리를 잠재운 라영이의 꽃향기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미래는 내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볶음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시 물어보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내가 미래랑 조금 친한 친구일 뿐인데 벌써 두 달이나 된 일을 이제 와서 갑자기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그래서 미래는 초콜릿을 줬다는 거야 안 줬다는 거야... 효석이가 미래 옆에 앉은 이유가 있었구먼.     


 그나저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될 것 같다. 효석이 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한 분이실 줄은 몰랐다. 물론 효석이 아버지와 효석이는 구분해야겠지만 그래도 효석이 집안이 대단한 건 분명하니까. 미래와 같은 그 빌라단지에 살 정도면 집도 엄청 부자일 텐데 효석이는 수수하다 못해 거의 가난 코스프레에 가깝다. 그 말도 안 되게 화려한 고급빌라에 우리 반 친구가 2명이나 살고 있다니... 심지어 그중에 1명이 효석이라니...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들, 많이 늦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아, 학교에서 공부 좀 더 하다가 왔어.”     


 요새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다 보니 정작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다. 그에 비례해서 엄마의 잔소리는 늘어난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내 거짓말도 늘어가고.      


 성적에 대한 엄마의 집착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공부를 잘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아들의 마음일 텐데... 그건 중학교 때까지였던 것 같다. 대학 진학이라는 중대한 인생의 성취가 결정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엄마는 나의 많은 것들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해주시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 전 1,2월은 숨 막힘 그 자체였다. 나의 모든 걸 통제하려는 엄마를 벗어나고 싶었다. 겨울방학이지만 학원, 독서실, 집으로 이어지는 일정은 너무 잔인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전교 2등까지 한 나에게 엄마의 잔소리는 많아졌다. 엄마는 학창 시절 전교 2등은커녕 전교 10등 안에도 못 들어 봤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나에게 훈계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각자의 공부 스타일이 있다. 내 스타일은 공부할 때 집중해서 열심히 하고 놀 때는 확실하게 노는 것이다. 난 절대 공부만 할 수 없다. 쉬는 시간과 노는 시간이 없으면 난 공부를 지속할 수 없다. 그걸 잘 알기에 중학교 때는 딱 밤 11시까지만 공부하고 1시간을 놀다 잤다.     


 하지만 정확히 17살이 되던 1월 1일부터 엄마는 그 1시간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내 공부 집중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엄마는 결실을 맺고 싶어 했다. 나를 키우고 공부를 시키는 것의 최종 결실을. 그리고 그 결실은 반드시 서울대여야만 했다. 서울대 다니는 아들을 둔 엄마. 이게 엄마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타이틀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보다 한술 더 뜨셨다. 외할머니는 늘 집안에 서울대 다니는 사람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외가에서는 서울대는 한 명도 없었다. 고려대에 다니는 사촌형이 있었으나 외할머니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서울대만을 원했다. 외할머니는 설날이면 내게 노골적으로 세뱃돈을 많이 주셨다. 다른 사촌 동생들에게서 공부의 희망을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공부를 잘하는 건 좋지만 엄마를 내 성적으로 기쁘게 해드리고 싶지 않다. 엄마의 저 비뚤어진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요새 매일같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도 엄마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싶어서다.        

  

 ***


“어! 일찍 왔어?”     


 라영이와 짝꿍을 한 이후로 라영이는 지금까지 나보다 늦게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하다며 학교를 항상 일찍 오는 나라한테 물어봤더니 라영이는 나라보다도 항상 먼저 와 있었다고 했다. 대체 집이 어디 길래 저렇게 일찍 오는 거야... 날마다 아침이면 알람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나로서는 라영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마지막 5분이라도 무조건 더 잔다는 것이 내 철칙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밤에 잠을 늦게 자긴 한다. 라영이는 아침형 인간인 건가..?     


 라영이는 미래와는 조금 달랐다. 철두철미한 스타일은 아니었고 수업시간에 때로는 졸기도 했다. 라영이와 처음 짝꿍 될 때만 해도 떨려서 전혀 잠이 안 오던 나도 며칠 지나자 수업 시간에 한 번씩 졸음이 쏟아졌다. 이건 명백히 선생님이 수업을 못 하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미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한결같이 곧은 자세로 수업을 듣는 효석이도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의외로 둘이 잘 어울리... 그렇게 또 잠이 들었다.  

   

 “라영아! 혹시 너 향수 어떤 거 써?”     


 라영이 옆에 올 때면 항상 좋은 향이 났다. 처음에는 내가 라영이에게 빠져서 향기마저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라영이에게서는 늘 비슷한 향기가 났다. 향수라고 하기에는 연한 향이었지만, 조금씩 뿌리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향이 너무 좋아서 향수를 같은 걸로 한 번 사볼까 하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다.     


 “향수? 나 향수 안 쓰는데?”     

 라영이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너한테 가까이 가면 분명히 좋은 향이 나는데... 이상하다.”

 “혹시 꽃 향기 같은 거야?”

 “응! 맞아! 사실 향수라고 하기에는 좀 약하고... 인공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향이긴 한데...”

 “너 후각이 엄청 예민하구나?”


 내 후각은 감사하게도 좋은 향에 예민하다.      


 “네가 맡은 향이 맞을 거야. 꽃 향기 같은 거. 사실 우리 엄마가 꽃집을 하시거든.”

 “그치? 내 코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었네! 근데 왜 아침마다 향이 나지? 그렇게 아침부터 꽃집 문을 열지는 않을 거 아냐.”

 “아침에 내가 엄마 꽃집 가서 오픈 준비 도와주고 학교 오거든. 그러다 보니 꽃집 향기가 내 몸에 남아있는 것 같아.”     


 라영이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눈웃음 속에 꽃이 한가득 들어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맨날 학교 일찍 오는 거였어?”

 “응. 엄마랑 가게에 일찍 가거든. 일 다 도와드려도 등교 시간까지 한참 남더라고. 가게에 있기도 애매해서 그냥 일찍 학교 오고 있어.”     


 라영이는 심지어 효녀다. 엄마와 냉전 중인 나는 라영이가 그저 대단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라영이가 이런 나를 알게 되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싶기도 하다.     


 “나중에 꽃 살 일 있으면 너희 어머니 가게에서 사야겠다!”

 “가게가 학교에서 좀 멀어서... 그래도 나중에 언제 기회 되면 한 번 놀러 와.”


 마음 같아서는 오늘 당장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라영이 어머니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공부도, 뾰루지도... 모두 엉망이다.        


 ***  


 “야! 공부 좀 했냐? 이번에는 전교 1등 해야지?”     


 등굣길부터 만난 영만이는 내게 말을 걸었다. 영만이의 저 말속에 악의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마음이 좋지 않다. 전교 1등은커녕 반 1등조차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공부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당장 다음 주가 시험인데...     


 난 원래 미리 공부를 해두는 스타일이다. 벼락치기는 중학교 때 한 번 도전해 봤는데 실패했다. 밤에 공부는 잘 됐지만 정작 시험 보는 시간에 너무 졸렸다. 정말 절박하다고 나 스스로에게 수백 번 말했지만 내 몸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졸린 상태로 시험을 보니 당연히 성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시험 전날은 평소보다 더 많이 자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래야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기억이 날 것도 나지 않는다. 반면에 컨디션이 좋으면 우연히 스치듯 봤던 교과서 속 문구도 기억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시험만큼은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렇게 미리 공부를 하지 못했던 시험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긴 했다. 그래도 사건은 사건이고 공부할 때는 공부를 했었어야 했는데... 책을 펼치면 잡생각이 나를 방해했다.      


 우리 반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맨 앞줄에 있는 저 두 사람이다. 미래와 효석이. 처음 2학년 4반에 배정될 때 내가 우리 반 1등, 미래가 2등, 효석이가 3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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