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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07. 2023

20화 - 성적은 떨어져도 탕수육은 맛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우리 반 3등 효석이는 정말 한결같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흔들림이 없다. 내가 친구들이랑 축구하고, 말하고 노는 시간에 효석이는 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본다. 공부 시간이 성적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효석이는 증명해주기도 했다. 저 정도로 공부하면 전국 1등을 하고도 남아야 맞을 것 같은데...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효석이의 공부 방법에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효석이가 저 페이스로 계속 공부한다면 언젠가 나를 넘어설지 모른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처럼 내가 잠깐 졸기라도 하면 금방 역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이번 시험이 될지도 모르고.     


 우리 반 2등 미래는... 한 달 동안 짝꿍을 하면서 지켜본 미래는 그저 대단했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좋은 머리와 공부 센스가 있었다. 거기에 세상의 흐름과 판세까지도 읽을 줄 안다.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에서 빛을 발할 스타일이다. 내신보다는 수능에 더 강할 것 같고.     

 

 그럼 나는 어떠한가... 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해서 모든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거기에 잘생긴 얼굴까지... 엄친아라는 단어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남중에서 살다가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온 것이 문제였다. 여자라는 존재는 나를 참 어렵게 만들었다. 인기 많고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건 좋았다. 그런데 그만큼 공부 이외에 시간을 써야 할 일이 많아졌다. 중학교 때는 축구하고 pc방 가서 게임 좀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여자들과의 수다도 추가됐다. 게다가 효진이 사건부터 현선이와 라영이의 다툼까지... 2학년이 되니까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생겨서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때는 저녁에 공부가 정말 잘 됐다. 내 머릿속을 방해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온갖 것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최근에도 라영이와 현선이의 싸움으로 며칠을 그 생각만 하며 밤을 보냈던가...


 내가 유혹에 약한 것도 문제다. 친구가 부르면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나 없으면 축구 인원이 부족하다는데 안 갈 수가 있을까..? 미래가 이모 탕수육 먹으러 가자는데 안 갈 수가 있을까..? 라영이가 수학 문제 푸는 법을 알려달라는데 그걸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내 성격상 불가능하다.


 이런 걸 하나하나 다 하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수업 시간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쨌거나 복습이란 건 필요한데... 내가 천재는 아니니깐. 얼굴은 천재과지만.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건 여유 있는 시간과 집중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도 없고, 집중력도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중학교 때는 별생각 없이 공부했고 전교 2등을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또 열심히 했다. 그렇게 수석 입학까지 했지만 전교 2등에서 한참 내려온 지금은 공부가 딱히 즐겁지 않다. 전교 1등은커녕 반 1등도 쉽지 않을 것 같다.         

 

 ***


 중간고사가 끝났다. 학교생활 중 가장 즐거운 날 중 하나를 꼽으라면 시험 끝난 날일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못 본 자에게 이 날은 매우 괴로운 날이다. 몸은 놀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기분이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딱 그랬다. 공부량이 부족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처참한 수준일 줄은 몰랐다. 난 pc방을 가자는 영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기분으로 가봤자 애들한테 민폐일 뿐이다.     


 어디 가서 뭘 해야 하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는 최대한 늦게 들어갈 생각이다. 물론 엄마는 내 성적이 너무 궁금해서 내가 들어올 때까지 안 자고 있겠지만...


 학교에서 핵인싸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지금은 연락할 만한 친구가 없다. 정혁이는 헬스장에 갔고, 영만이는 용산에 게임을 사러 갔다. 매우 우울해지기 직전이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을 때 바지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디야?”라는 톡을 봤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저 폰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한 번이 아니다. 계속 울린다. 이번에는 톡이 아니라 전화다. 폰 화면에서는 ‘미래’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여보세요.”

 “내 톡 안 봤어? 왜 답이 없어? 어디야?”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편하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좀 그래서 그냥 계속 걷고 있었어. 여기가 어디지... 이령병원이 내 앞에 있는데.”

 “응? 뭔 생각으로 거기까지 걸어갔어? 멀리도 가셨네. 으이구.”


 미래가 내 엄마인지 친누나인지 친구인지 헷갈린다.     


 “점심 안 먹었지?”

 “응. 그랬을 걸?”

 “참나. 비련의 남주야? 이모 탕수육으로 얼른 와. 밥 먹자.”

 “너 점심 안 먹었어?”

 “나 시험 끝나고 어디 좀 들리느라고. 배고프다. 빨리 와.”     


 전화를 끊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모 탕수육을 먹으려고 사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잠깐 스친다. 이대로 이모 탕수육까지 달려가리라... 하지만 10초 만에 실패를 인정했다. 공부도, 체력도 다 저질이 됐다. 택시를 탈까 했지만 돈마저 저질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버스를 탔다. 조금 늦어도 미래가 이해해 주겠지.          


 ***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무심한 인사를 내게 날린다. 이모님이 환한 미소로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오늘은 안 보인다. 가뜩이나 시험 때문에 다운된 기분이 더 가라앉는다.  

   

 “어차피 탕수육 먹을 거지? 배고파서 미리 시켰어.”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센스까지 갖출 수 있는 걸까. 미래는 사랑스럽다. 탕수육이 맛있어서 행복한 건지, 탕수육을 같이 먹는 미래가 날 행복하게 해주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시험은 못 봤지만 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창 먹는 18살 나이다. 심지어 나는 키가 커야 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먹어야 한다.     


 “미래야 오늘 이모님은 안 보이시네?”

 “응. 이모는 보통 오후 늦게 나오시거든.”

 “아... 아쉽다. 지금 딱 군만두 서비스 타이밍인데! 이모님 계셨으면 애교로 부탁해 보려 했는데...”     


 내 얼마 남지 않는 용돈으로 이 비싼 식당에서 군만두를 사 먹는 건 사치다. 게다가 시험까지 못 봤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 탕수육은 누가 계산하는 거지? 너무 당연하게 먹어버렸다. 탕수육이 4만 원인데... 미래랑 둘이 나눈다고 해도 2만 원... 거기에 짜장면 만 원... 후. 이번 달은 적자 확정이다.     


 “미래야! 여기 군만두 서비스!”

 아까 봤던 그 종업원이 군만두를 들고 들어왔다. 무뚝뚝해 보였던 종업원이라 생각했는데 군만두를 들고 와주니 좀 다르게 보인다.    

 

 “응 오빠! 고마워!”


 오빠..? 종업원한테 오빠라고?     

 종업원이 가고 나서도 내가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뭘 그렇게 의심 가득하게 쳐다봐! 사촌 오빠야 사촌 오빠. 이모 아들이라고!”     

 헐... 그러면 잘 보였어야 하는 건데... 군만두 서비스도 주시는 소중한 분이신데... 나 너무 그분을 처음부터 계속 삐딱하게 쳐다봤다. 시험도 망하고 이것도 망했다.     


 “괜찮아. 오빠 너 별로 신경도 안 써. 오빠 2주 뒤에 군대 가거든.”

 아... 정말 더 죄송합니다 형님...


 아까부터 미래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늘 밝은 아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더 좋아 보였다. 시험을 잘 본 것이 확실하다.     

 

 “시험은 잘 봤어?”

 군만두까지 먹고 있으니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나 보다. 미래에게 먼저 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실수한 건 없었던 것 같아.”

 와... 객관적으로 정말 재수 없는 대답이다. 물론 탕수육과 군만두와 함께 하는 지금, 나를 이곳으로 불러 준 미래가 말하는 대답이라 괜찮다.      


 “넌? 잘 봤어?”

 “미래야. 미리 축하해. 네가 반 1등 확정인 것 같다.”

 “에이. 왜 이래. 서랑고등학교 수석 입학 장유준 님께서 겸손하기는.”

 “정말이야. 거의 인생 최악의 시험이지 않았나 싶어. 근데 당연하지. 나도 노력한 만큼 본 것 같아. 노력을 너무 안 한 것 같아.”


 미래는 측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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