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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11. 2023

22화 -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난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가 즐거웠어. 잘하니까 즐거웠던 것 같아. 공부를 잘하니까 엄마가 좋아하고 주변에서 날 인정해 주더라고.”

 화려했던 나의 중학교 시절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와서 성적이 떨어지니까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더라. 엄마는 늘 내게 만족하지 못하고 닦달했어. 날 인정했던 주변의 시선도 묘하게 바뀌어 가는 게 느껴지더라. 어느새 나에 대한 칭찬은 공부에 대한 건 사라지고 얼굴에 대한 것만 조금 남았지.”


 무너져 가는 자존감 속에서도 외모에 대한 자부심은 아직 붙잡고 있었다.    


 “공부는 축구랑은 다르더라고. 내가 축구를 잘하니까 더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축구 그 자체가 정말 좋거든. 내가 축구를 못하거나 우리 팀이 진 날은 분하고 기분이 안 좋지만 그렇다고 축구를 다시 안 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거든. 오히려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근데 공부는 아니더라고. 성적이 떨어져서 똑같이 기분이 안 좋지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 네가 이번 시험에서 날 이겼지만 분하다기보다는 그냥 축하해 주고 싶어.”   

   

 미래는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미래야. 난 내가 왜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어. 아무 생각이나 이유 없이 하니까 열심히 안 하게 되더라고. 내가 축구할 때 미친 듯이 뛰어다는 거 알지? 왜 그런지 알아? 축구를 하면 무조건 이겨야 되거든. 지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죽을 듯이 뛰는 거야. 그거 이긴다고 누가 상을 주거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겨야 돼.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문제는 그런 승부욕이 공부에서는 생겨나지 않아. 전교 1등을 무조건 해야지라고 생각해 봤지만 전혀 절실함이 담기지 않았어.”     

 “라영이랑은 어때? 라영이랑 짝꿍 하니까 좋아?”


 미래는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좋긴 좋아. 근데 네 옆에 앉았을 때만큼 공부가 잘 되지는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너랑 앉을 때는 별 것이 없어도 정말 재밌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야.”

 “라영이 아직도 좋아해?”


 미래는 참 직설적이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다니... 내가 라영이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심지어 이건 내 눈맞춤 타임인데! 내가 물어봐도 모자랄 판에... 공격을 당했다.


 물론 어차피 이 눈맞춤 시간이 끝나면 미래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할 것이다. 그래도 내 진심을 대놓고 말해주고 싶진 않다. 미래가 지금을 다 기억해 버리는 건... 싫다.      


 “미래야! 너는 좋아하는 남자 있어?”


 화제를 돌려본다. 그리고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 눈맞춤 시간에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다. 난 라영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미래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나쁜 남자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비밀이야. 너도 대답 안 해주니까 나도 대답 안 해줄 거야.”

 미래는 입술을 지퍼로 채우는 행동을 했다.     

 

 “우리 이제 나갈래?”

 아... 안 된다. 아직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 폰 시계가 여전히 멈춰있다.   

   

 하지만 미래가 자꾸 나가려고 한다. 내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다.

     

 “근데 미래야. 너는 우울하거나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내가 지금까지 본 미래는 대부분 밝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울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래 집이 부자여서일까... 아니면 천성이 그런 것일까... 미래와 짝꿍을 할 때는 못 느꼈다. 그런데 짝꿍이 라영이로 바뀌고 미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있지.”

 “근데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런 모습?”

 “굳이 네 앞에서? 그리고 학교에서는 우울할 일이 거의 없는데? 화나는 일이라면 모를까...”

 “화나는 일? 뭔데? 누가 너 괴롭혔어?”

 “네가 반 1등이라고 들었을 때 처음에 화나더라. 분명 공부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은데 반 1등이라고 하니까.”

 “아... 그치... 응? 하지만 이제 1등은 이제 내 것이 아니야. 미래 네 것이야.”    

 

 오늘이 시험 끝난 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갑자기 다시 씁쓸해졌다.

 마침 폰 시계가 작동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미래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테스트해봐야 한다.     


 “미래야! 넌 공부가 즐거워? 왜 공부해?”

 눈맞춤 시간으로 들어가서 했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응? 갑자기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당황한 미래의 표정을 보니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확실하다.      


 ***


 집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내 고민에 대한 답은 하나도 못 찾았지만, 미래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아주 조금은 길이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 길은 다시 뿌옇게 변했다.    

 

 “장유준! 이번 시험은 몇 등 했을까? 반 1등은 당연하고 전교 1등 다시 찾았지?”

 “오늘 시험 끝났는데 무슨 등수가 벌써 나와!”


 나는 엄마에게 화를 버럭 내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등수가 나오기 전날 밤이 설렜던 날들도 참 많았는데... 이제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다음 날, 시험 결과가 나왔다. 디지털 시대가 돼서 좋은 점도 많지만 이런 건 별로다. 성적이 너무 빨리 나온다. 기다리는 맛이 없다. 1교시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시험을 보고 있을 때 이미 1교시 시험 성적이 나와 버리는 수준이 된 지 오래됐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미래가 1등이었다. 문제는 내가 2등이 아니었다. 2등 자리에는 효석이가 있었다. 난 3등이었다. 그것도 4등과 고작 1점 차이 나는 3등. 수석 입학이 반 3등까지 추락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4등은 현선이다. 라영이는 5등이고.     


 오늘 집에 가기 정말 싫다. 성적표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엄마 얼굴이었다. 발 넓은 엄마는 이미 내 성적을 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충격에 허탈해하거나 극도로 분노하고 있을 거다. 오늘은 폰을 꺼둬야 할 것 같다.     


 쿨하게 미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순간 라영이가 나를 불렀다.


 “유준아”

 “응?”

 “기분 괜찮아...?”

 “기분?”

 “괜히 위로해 주려다 네가 더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짝꿍이니까. 우리 다음에 더 잘하자!”  

   

 라영이는 특유의 눈웃음에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을 담아 내게 말했다. 이 얼굴을 보고 라영이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이번에는 공부를 너무 안 했던 것 같아. 괜찮아. 다음에 더 잘할 수 있겠지.”     

 라영이에게 떳떳하고 자신감 있었던 나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릴 수가...

     

 “응. 넌 잘할 거야.”

 라영이는 천사 같은 얼굴로 내게 위로를 건넨다.


 “라영이 너는 어때? 잘 봤어?”

 라영이가 5등 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 물어본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생각만큼 성적이 오르진 않네. 우리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보자. 파이팅!”     


 파이팅이라는 단어... 정말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라영이가 하니까 진심으로 힘이 솟는다. 이 힘을 시험 전에 받았으면 좋았을걸...     


 “근데 우리 반 1,2등은 우리 앞앞 자리에서 다 했더라. 효석이도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2등까지 올라가고 멋있더라!”     


 뭐? 효석이가 멋있다고..? 라영이에게서 한 번도 멋있다는 말을 못 들어봤는데 효석이는 고작 2등 한 번 했다고 멋있다는 말을 들었다. 억울하다.     


 “내가 원래 1등이었는데...”

 라영이가 듣지 말았으면... 아니 그래도 들었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이 섞여서 목소리가 나오다 말았다.     


 “나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제일 멋있는 것 같아!”

 라영이의 이 말은 내 후두부를 강력하게 때렸다. 아... 그래서 라영이가 내 옆에 앉았던 걸까? 내가 1등이라서? 만약 그렇다면 라영이가 지금은 효석이 옆에 앉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런 걸 시험이 다 끝나고 알게 된다는 말인가. 갑자기 강력한 동기부여가 생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하게 생겼다. 내 옆에 있는 라영이! 라영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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