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을 썼습니다

by 휴리릭

올 한 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평온하던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분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지금 평균 수명으로 보면 아직 한참 젊은데 말이죠. 그분도, 우리도 서로에게 마지막 말조차 전하지 못하고 그분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학교 때 알았던 선후배 중에 벌써 3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그래도 한 때는 같이 캠퍼스를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이 없다는 건... 특히나 친하게 지내던 형과 쓸데없는 농담조차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건... 가끔씩 꽤 힘들었습니다.


평범한 어느 날,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지금 세상입니다.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날 수도 있고,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음을... 언제든지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곤하고 비슷한 일상을 살다 보니 내일도 비슷한 하루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뉴스로만 보던 그 누군가의 불행과 죽음이 내 일이 절대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조금 놓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아끼려고 했던 것들을 조금 더 내려놓았습니다. 지금 더 재밌고, 지금 더 즐거운 일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유언장을 썼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진 않겠지만, 갑자기 어느 날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몇 십 년을 살아온 인생을 마무리할 기회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건 조금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이 한 명뿐이고,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유산에 대해 할 말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신 세상에 대한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별로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자꾸 쓰고 싶은 말들이 생겨나서 한 번씩 수정하고 있습니다.

자필로 써야 효력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자필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직접 쓰기 시작하면 갑자기 현실이 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장기기증을 신청했습니다. 삶이 간절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연명치료 중단도 신청할 예정입니다. 온라인으로 가능한 장기기증 신청과 다르게 이건 직접 기관을 찾아가야 해서 아직 완료하지는 못했지만, 조금만 시간이 나면 바로 가서 신청하려고 합니다.


소액이지만 정기기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추억을 안겨 준 대학교에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돈을 더 잘 벌면... 내가 더 여유가 생기면... 이런 가정을 하다 보니 기부를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마음먹었던 좋은 일은 그냥 지금 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바로 정기기부를 신청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대학교에서 선물을 보내줘서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두고 있습니다. 이런 뿌듯함에 기부를 하나 봅니다.


snu 브릭달력.jpg 대학교에서 기부 선물로 보내준 블록 달력


브런치에는 한동안 아예 들어오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과연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운가?’라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좋아하는 산책과 추리소설 읽는 것에 제 여유시간을 모두 썼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시 글을 쓰는 건 지금 이 글이 혹시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글을 몇십 년 더 쓸 수도 있겠지만, 당장 내일부터 쓸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면 흰머리는 얼마큼 나는지, 이번 건강검진에 대장내시경을 할 건지, 영양제는 어떤 걸 먹는지가 주요 대화 소재입니다.


러닝 열풍을 보면서 저의 20대를 떠올려 봅니다. 한 때는 저도 달리기에 미쳐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신체적 하락세가 너무 일찍 찾아와 버린 것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죠.


그래서 내 앞으로 인생에서 가장 젊은 오늘, 오래간만에 몇 글자라도 적어봤습니다.


글을 조금이라도 잘 써보려고,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 글자 쓰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능력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너무나도 무섭게 진화하고 있는 AI 앞에서 점점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런 건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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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를 습득하는 목적은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심신을 건강하게 단련해서 얻은 여유로 인생을 즐겁게 의욕적으로 지내기 위해서다.”


<드래곤볼>이라는 만화에서 손오공과 크리링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눈 대화입니다. 이 만화책을 본 건 아주 옛날인데, 이 대사가 다시 가슴에 새겨지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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