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정말 작가인지 되묻곤 한다. 내가 진짜 미술 작가라면- 내 작업이 취미 작업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혹여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일기 같은 독백을 늘어놓고 있는 건 아닌지, 과연 이 모든 게 유의미한지. 조금은, 또 가끔은 꽤 의심스럽다.
작품 하는 즐거움을 일찍이 느껴왔다지만 이 길을 가게 된 결정타는 투병이다. 아무렴 그것이 사실이고, 그 이유 때문에 실제 작품 활동에 페널티가 있다 하더라도 평생 그 이야기만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이 어떻든 예술 세계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작품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작품 자체의 격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소망’, ‘평안’, ‘기쁨’으로 이어진 내 내밀한 이야기가 더 넓은 영역까지 파고들기 위해서- 즉 더 크고 깊은 작업을 위해서 끌어내야 하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동시대 이야기가 되도록 잇는 그 무엇 말이다.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가도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는 지금. 그걸 완벽하게 알게 되는 순간에 나는 당당하게 작가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최근 석논 심사를 앞둔 흰에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사람이지 누굴 붙잡고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때 속으로 품고만 있던 위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도록 들어준 흰에게 참 고마웠다. 수화기 너머로 오가는 말들 사이에 있음 자체가 힘이 되는 기분이었달까. 또 오랜만에 연락한 지니와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오래 버티면 되는 거라고, 이 길은 긴 마라톤이나 마찬가지라고- 친구들과 나눈 대화는 내가 자꾸만 잊어먹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창작을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을 때, 새 언어를 얻은 것 같았던 그 느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고 믿는다. 미술은 정말로 언어이니까. 새 언어를 얻은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혼잣말을 하다가도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대화를 하며- 그렇게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한 만큼 능숙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면서, 떠듬떠듬 누군가를 따라 말하던 어린아이가 유려하게 자신만의 문장을 구사하게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작품에서 보길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매력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넓고 깊이가 있는지에 따라 달리 느껴진다고 한다. 내 작품이 자연스럽게 매력을 풍긴다면 얼마나 멋질까. ‘언제쯤이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하는 조급한 생각보다는, 시간과 과정이라는 끌을 즐겁게 견딜 수 있길. 사람이든 작품이든 그런 성숙한 완성을 이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