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래로 보낸 순간

by 안혜빈

필름 다 찍으면 현상 맡겨야지— 그 다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빛이 스며들까 통 안으로 꽁꽁 감긴 필름이 어느덧 네댓 개가 쌓였다.


필름값이 급격히 오른 몇 년 전부터 나는 외출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처럼 특별하고 드문 순간에만 필름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필름 카메라를 드는 게 ‘드문 순간’임을 생각할 때, 필름이 이 정도로 쌓였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쌓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 맡기는 일을 미루면 끝도 없이 미룰 수 있었을 테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어 사진관에 가기로 했다. 머릿속에 그간 카메라로 담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 까닭이다. 그들과 했던 약속들도. 내 가장 오랜 친구 A, 함께 여행했던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 J, 친동생 같은 E, 멀리 해외에서 온 귀여운 친척 동생들 등등. 그 얼굴들과 맺은 약속이 나를 밖으로 나가도록 재촉했다.


그리하여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다 위 다리 건너 사진관으로 향했다. 봄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걷는 동안 필름 속 묵혀진 시간을 가늠했다. 아무래도 1년하고도 몇 개월은 훨씬 넘었을 것 같았다.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을 텐데 언제, 어떤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셔터를 누른 순간만큼은 분명 특별했을 것이기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까맣게 잊고 만 것을 곧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사진관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아 일부러 이러저러한 풍경에 한 눈을 팔고 느긋한 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이라 그런지 길게 늘인 길도 훨씬 짧은 느낌이었다. 나는 금세 도착한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가 나를 맞아주는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필름 맡기러 왔어요.”


사진관 주인아저씨는 뒤쪽에서 어떤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다 말고 테이블로 나온 직원 앞에 나는 가방에서 필름을 하나씩 꺼내 테이블에 세웠다. 흑백 필름 세 개, 컬러 필름 하나. 그다음 직원에게 내 이름을 말하고, 내 이름의 ‘혜’자를 ‘해’라고 잘못 적지는 않는지 지켜보며,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확인하고는 계산할 카드를 건넸다.


오랜만에 온 사진관이었는데도 모든 과정이 루틴처럼 익숙했다. 그런데 조금 낯설기도 했다. 내 신경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세워진 필름들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평소엔 많아봤자 두 롤 정도였는데, 배로 늘어나서 그런가. 그건 마치 시간을 얼린 토템 같았다. 혹은 과거에서 오늘로 보내온 타임캡슐이라든가.


직원은 계산을 마친 후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컬러 필름은 오늘 안에 받아보실 수 있고 흑백 필름은 하루 이틀 정도 걸릴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얼었던 순간을 녹이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가뿐하게 사진관을 나섰다.








사진을 찍고 나면 피사체가 된 사람들에게 말했다.


“필름 스캔본 받으면 보내줄게.”


대신 그 말 끝엔 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라는 기약 없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드디어 그 약속들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래된 짐을 벗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필름 사진을 건네곤 했다. 필름값이 부담되어 한 컷 한 컷 신중히 찍다 보면 한 롤을 다 채우는 데 시간이 걸렸고, 다 찍었다 해도 바로 필름 현상을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36컷이 다 찍힌 필름은 정말로 순간이 물화된 것 같아서 필름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약속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촬영의 신중함이니 외출의 어려움이니 하는 것들은 종종 표면상의 구실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아주 솔직히 말해, 조금 얄궂은 마음으로 약속을 외면할 때도 있었다. 나는 나에게 사진 찍힌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는 기억조차 잊기를 원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결과를 미루기. 찍고 나서 잊기. 시간이 흐른 후 잊어버린 장면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생기는 의외성과 반가움. 모두 내가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이유이다. 특히 나는, 미래로 떠나보낸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에 느끼는 감정이 좋았다.


그런 유별한 감정을 더 크게 느끼기 위해서라면, 역설적이게도 함께 간직하고자 붙잡은 순간을 더, 더 오랜 미래로 미룰 필요가 있었다. 기억하려 했던 마음마저 흐릿해질 때까지. 약속을 기억하면서도 외면하고자 했던 것은 나의 유난이었다. 사람들을 한없이 기다리게 한 건 미안한 일이었으나 그만큼 진정으로 반갑고 소중한 선물이 되기를 바란 마음이 만든 지연이기도 했다.








하루, 그리고 이틀. 사진관에 방문한 후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시간을 기다려온 필름인지라 하루 이틀쯤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기다리다 보니 그 시간이란 게 참 길게 느껴졌다.


메일함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 반복했는지 모른다. 내게 찍힌 사람들도 처음엔 이렇게 기다렸을지 모르겠다는 조금 미안한 생각을 하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있다 보니 어느새 필름 네 개의 스캔본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열었다.


마침내 얼어있던 순간의 해빙.


사진을 보는 순간, 잊혔던 기억이 하나씩 조립되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들이었다. 초점이 나가고 흔들린 사진들조차도 좋았다. 빛이 부족한 장면도. 셔터를 누르고자 했던 순간의 마음이, 그 이후 지나온 수많은 계절이 어설픔과 미숙함마저 다 품어주는 듯했다.


사진 전체를 한눈에 훑은 후, 이제 천천히 곱씹듯 하나하나 다시 바라보기로 한다. 재회한 순간이 반가워 미소가 흐른다. 밀려오는 시간에 묻히고 말았던 추억의 조각을 더듬는다.


사진 한 장 한 장 속에서 이야기가 흐른다. 흐릿한 장면이 선명해진다. 동시에 그때의 얼굴들이 지금도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아마 사진 속 순간을 잊었겠지. 당연히 잊었을 시간이다.


나는 확신한다. 미래로 보내진 순간을, 오늘 당도한 이 순간을 현재로 이을 때가 되었구나. 조만간 깜짝 연락을 해야지.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고, 잊었을 그때 그 장면을 드디어 너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지.


그렇게 선물을 준비한다.


지연된 결과, 잊었던 순간, 그 모든 시차를 넘어서— 사진을 받아보는 얼굴들은 어떤 풍경이 될까.


“와, 여름이었네!”

“이 사진 좀 봐. 사진 찍는데 갑자기 웬 아저씨가 쓱 지나가서 우리 한참 웃었잖아.”

“너 표정 정말 자연스럽게 잘 나왔어. 예쁘다.”


아마 직접 만나 건넬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을 다시 또 기억 너머로, 미래로 보내고 싶어지겠지.









2024.01. ~ 2025.03.

_CAMERA

LEICA Z2X / KODAK Toy Camera M35

_FILM

KENTMERE PAN 100, 400 / Rollei RPX 40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낭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