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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는 일

by 안혜빈

대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라 그나마 한숨을 돌리던 어느 날이었을 거다. 4학년으로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같은 과 선배이자 친구인 J와 서로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혹시나 내가 미술작가의 길을 가게 된다면 편의점 알바라도 해서 어떻게든 작품을 해나갈 거라는 얘기를 했다. 진심이었다. 내가 일을 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였지만.

내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밀려오고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생각이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일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아쉬움도 함께 밀려온다. 만성적으로 취약하고 불안정한 몸이 됐다는 건 이미 능력의 상실을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무력하다. 그러나 능력을 잃었다고 하기엔 내 안에 잠재성이 분명히 느껴지고, 능력이 있다고 하기엔 실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가끔 슬프다.

매일 늦게 일어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귀여운 고양이랑 장난치는 일, 작은 화단의 식물들을 가꾸고, 원하는 대로 티타임을 즐기며 여유로운 일상을 지낸다는 게 얼마나 포실한지 안다. 나는 복을 받았다. 정말 복을 받았다. 날마다 나에게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어찌나 감사한지. 하루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신다. 그런데도 하나를 잃은 일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나는 그 찬란함 속에 가끔 말할 수 없이 서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잃은 것을 부정하거나 원망하며 분노하는 마음은 한참 전에 앓고 지나갔다. 어느새 체념도 넘어서고 내 삶을 그대로 수용하는 지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데, 눈물을 흘려야 하는 날은 알 수 없이 찾아오곤 한다.

나는 삐져나온 슬픔을 보며 생각한다. 아직 지나간 이야기가 되지 못했구나. 지나간 이야기처럼 웃으며 말할 때가 있겠지. 언젠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진 듯 보이는 내 능력도 쓰일 날이 오겠지. 잠든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사랑받은 만큼 나도 나누고 싶은데. 내게도 그런 날이 있겠지. 세상에 하고 싶은 것과 주고 싶은 것들을 이루는 날이.

그렇게, 밀려오는 마음을 잠잠한 기다림 속으로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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