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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수용능력(Negative Capability)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것으로, 그가 문학과 예술에서 중요하게 여긴 개념이다. 그 의미는 ‘예술가들이 지적 혼란과 불확실성에 빠지더라도 아름다움, 완벽함, 숭고함의 이상을 추구하는 능력’이다. 즉, 문학과 예술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강박 없이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도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뜻한다. 이 용어는 키츠가 그의 형 조지에게 보낸 편지(1817)에서 처음 등장한다.
나는 딜케(Dilke)와 여러 주제를 두고 논쟁이라기보다는, 진지한 토론을 나눴어. 그 과정에서 여러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서 서로 맞물려 들어갔고, 문득 이렇게 느꼈지— 특히 문학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압도적으로 지녔던 어떤 자질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말이야.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부정적 수용능력(Negative Capability)이야. 즉, 사람이 불확실함, 신비, 의심 속에서도 사실이나 이성에 대한 안달나는 집착 없이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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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츠(1899). 존 키츠 시집과 시리즈 전집, 케임브리지 에디션. 호튼 미플린 앤드 컴퍼니. 277쪽.
19세기 초였던 당시 유럽은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모든 것을 이성과 과학,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던 그때 키츠는 시인으로서 예술가의 직관과 감성, 모호함과 불확실성의 아름다움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는 삶과 인간 경험이 항상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설명되지 않는 여백 속에 더 깊은 진실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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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은 1990년대 심리학자 테데스키(Tedeschi)와 칼훈(Calhoun)에 의해 제안된 개념이다. 극심한 고통 이후의 단순한 회복을 넘어 삶의 인식 자체가 변화하고, 외상 이전보다 크고 더 깊은 성장이 일어나는 과정을 말한다. 임상심리학의 맥락에서 연구되며 트라우마 이후에 개인이 경험하는 긍정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트라우마란 설명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논리적인 언어로 환원되지 않고 원인도 해답도 불분명한 채 인간 존재를 흔드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일어나는 회복이란 단순히 과거를 덮거나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불확실성과 함께 머무르고 그것을 수용해가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부정적 수용능력이라는 예술적 개념이 외상 후 성장과 깊은 내적 유사성을 가진다고 본다.
부정적 수용능력은 해답 없는 상태, 불확실한 감정, 모순적 세계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으로 예술가의 태도를 말한다. 예술가는 뚜렷한 의도와 명료한 해석 없이도 어떤 감정의 진실, 특히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 하고 또 기어이 포착해낸다. 이 개념은 미학적이지만 동시에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상 후 성장이라는 심리적 변화 역시 단순한 심리적 회복이 아니다. 과거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감내함으로써, 그 안에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는 곧, ‘삶을 예술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내면의 서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정적 수용능력은 외상 후 성장의 예술적 측면을 은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의미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 잠잠히 머무는 용기와 감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연된 응답, 미완의 상태, 설명되지 않음 속에 열린 태도로 머무는 것. 쉽지 않겠지만,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기. 삶이 살아가도록 두기. 이 가운데 놀라운 것이 있는데, 삶을 믿는다면(믿어준다면) 그런 미해결 속에서조차 삶은 언제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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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수용능력’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낸 존 키츠는 어릴 적부터 가난과 질병, 부모님과 가족들의 죽음, 사랑의 실패 등 비극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생을 마감한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삶 속에 키츠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존재의 비극을 곱씹었지만, 분명하게 삶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 삶을 끌어안아 노래한 시인이었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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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on a Grecian Urn, 1819
John Keats
결국 예술은, 삶은. 비극 속에 열려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