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하나 그리는 데에 거북이가 따로 없다. 쉽게 그리고 싶지도 않지만,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런데 내가 지금 부딪히는 건 기술적인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내 안에 자리 잡아온 완성의 기준, 곧 미감이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종종 디자인 일을 할 때마다 나는 늘 빈틈없이 완결된 이미지를 만들었다. 통제 가능하고 질서 있는 이미지. 명확한 메시지를 품고, 적절히 기능해야 하며, 착실하게 구성된 결과물. 그 안엔 다른 생각이 들어설 틈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그건 내게 성실함의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의 체계였다.
그래서일까. 마침내 첫 그림을 마주한 나는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 여전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막힌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회화를 시도한 것치고 괜찮았다며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 내 그림은 답답했다. 조형적으로 여백이 있었지만 정작 그림은 틈 없이 닫혀 있었다. 완결된 이미지. 익숙한 습관. 디자인을 하던 내가 만들어낸 낯설지 않은 질서.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회화로 표현하고 싶었던 바는 정반대였다.
실제적인 작업을 하지 않고 한동안 이것저것 공부하며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작품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바라보며 깨달았다. 자연스럽다는 것, 힘을 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언가를 ‘완성’하는 그림이 아니라 무언가를 머물게 하는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을 흐르도록 열어둘 수 있는 그림. 느낌과 여운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작품. 무결한 완성도를 추구하던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 회화에서 요구되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그린 그림이 답답했던 이유는 기술의 문제를 넘어서 내가 그 안에 틈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되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다루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보이지 않음’을 수용해야 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음’은 나를 자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나는 보이지 않아 생긴 여백을 부재로 여긴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모자람처럼 보였고, 결국은 강박처럼 채워야만 하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사람이 조바심이 들면 잠잠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캔버스 앞에서 나는 그런 모양이었다.
디자인에서 순수 예술로의 진입, 그리고 회화로의 전환.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역행하는 듯한 이 과정이, 내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오랫동안 쌓아온 습관과 태도가 회화 앞에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지금 나는 연습 중이다. 채워내기만 하던 하얀 바탕을 비워내는 연습, 깊어질 틈을 남기기로 선택하는 연습, 의지로 여백을 지켜내는 연습, 불안정함을 견디는 연습을.
붓질을 함으로써 비울 곳을 찾아야 하고, 붓을 정확히 멈추기 위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역설. 이 사실이 적잖이 당황스럽다. 처음엔 채워야 하는 텅 빈 화면이 막막했던 내가, 이제는 그곳이 빈틈없이 채워질까 걱정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붓질 하나에 쉬이 사라져버릴 그 여백이 두렵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까 봐 더욱. 하지만 붓을 든 이상 망설임 없이 칠해야 하고, 정말 멈출 것이라면 결단하듯 용기 내야 한다. 주저하거나 떠밀리듯이 한 행동이 아닌, 주체적으로 해낸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기기 위해.
영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림 앞에서 하나의 사실을 배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허락하기’라는 것을 말이다. 숨의 허락. 그건 틈을, 실수를, 아픔을, 고통을, 슬픔을 허락하는 것이다. 모든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상황을 통과하는 것. 투명한 창이 되어 더욱 자기 자신다워질 것을 허락하기. 그래서 바닥을 드러내는 진실한 인간이 되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이 있으면 신뢰할 수 있고 그 모든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참고 기다릴 수 있다. 그리하여 기다림 끝에 조급함과 두려움, 온갖 불안과 근심, 걱정 사이를 뚫고 떠오르는 그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림이 보이는 여백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다면⸻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 되어갈 것이다. 더 이상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림 스스로가 말하게 될 거라고, 나는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