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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워야 하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다.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고 나약할까. 어떤 면에서 나는 나를 가장 미워한다. 내가 애쓴 끝에 내놓은 결과조차 마주하기 두렵다. 작품이라고 만든 그것이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날까 봐. 안다. 이 불안은 가정에 의한 것이다. 지금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로 떨고 있다. 졸업 작품을 할 때도 그랬고 개인적인 작업을 할 때면 항상 이래왔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이, 정말로 무언가 해야 할 시점에 두려움과 압박감이 엄습해서 아무것도 시도조차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이때 내 시선은 이름 모를 타자의 것이 되어 스스로를 공격한다. 애걔, 그렇게 고민하는 척 애쓰더니 내놓은 게 겨우 이거야? 실력도 없는 게 말만 번지르르했던 거잖아. 웃겨, ⸻결국 나는 내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꼴이다. 왜 이렇게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할까. 이런 모습이 종종 겸손처럼 비칠지 모르나 실은 교만의 다른 모양이라는 건 놀랍지도 않다. 난 그 누구도 나를 인정할 수 없게 하고 중요한 순간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이제껏 만들어 본 적 없는 허접쓰레기를 만들어보겠다며 장난치듯 말했잖아. 좀 즐겨보자. 용서하고, 사랑하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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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개월의 일이다. 나는 내가 내 삶과 나 자신에 대해, 특히 작업과 관련하여 기도하지 않고 있는 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잘만 기도하고 있었기에 나는 기도 생활을 그럭저럭 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왜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 기도를 안 하고 있던 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몸이든 마음이든 치료를 받아야 할 때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인정이다. 내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인정. 그런데 나는 내 마음 가장 바닥에 있는, 마주 보고 받아들여야 할 감정을 감추고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내가 완벽주의인 거 알아. 작품 잘 안 나올까 봐 걱정하는 것도 알아. 지금은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야. 아직 때가 안 된 거지. 문제없어, ⸻라는 생각으로 똘똘 무장한 내겐 별다른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나를 안다. 문제없다. 딱히 기도할 일도.’
그게 스스로가 만든 거짓인 줄도 모르고.
돌아보면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는 척이었다. 나는 ‘나를 안다’는 말 뒤로 숨었을 뿐이다. 정말 나를 아는가? 자문하여 거기 진실되게 답하자면, 모른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 지식, 내 상황, 내 감정… 그 모두를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나의 한 치 앞을 모르고, 그 안에서 바뀔 나를 모른다.
가장 우스운 것은 그런 스스로에게 속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감정을 마주 보지 못해서 교묘하게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그 핑계에 내가 넘어간다. 깊은 내 속을 뚫고 직면하지 않는 이상에 나는 그 가면에 맞장구치며 사는 거다. 모르고 속고, 알면서 속고. 진짜 나를 외면하고 회피한다.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자기기만은 이렇게나 쉬이 이뤄졌다.
나는 다른 문제보다도 특히 작품과 관련된 일에서 곧잘 ‘문제없다’고 방어하곤 했다. 졸업 작품을 할 때도, 그 이후 지금까지 개인적인 작업을 할 때도 항상 그래왔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텐데, 작업과 관련해서 만큼은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난 괜찮으니까. ‘괜찮다’는 가면을 쓰고 그저 작품을 잘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라는 일방적인 말만 내뱉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 문제의 본질을 보게 하셨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이미 다 아시지만, 인격적인 관계로 자기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길 바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가 벽을 허물고 내 깊은 속을 꺼내 보이기를 기다리셨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나를 가리는 가면도 벽도 없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연약한 상태 그대로. 그리하여 내가 마주한 감정은 다시, 두려움이었다. 이 감정이 내 삶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이 두려움을 다루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같은 문제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래도록 실패를 두려워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난 유독 성공적인 것을 좋아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완벽하게 잘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을 바랐다. 아무도 나를 채찍질하지 않는데 기질적 특성인지, 그 일을 나는 스스로 했다.
20대 초반의 오랜 입시 실패, 중반의 대학 생활 번아웃, 그리고 후반의 원치 않는 투병 생활. 그러나 지난 10년의 시간은 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매달려온 성공에 대한 마음이 많이 깎이고 부서졌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투병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한참 궤도를 벗어난 삶.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보통의 궤도를 이탈했으니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면 그만이고, 삶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깨달아가고 있으니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해소되지 않는 두려움이 있었다. 거기서 오는 불편한 느낌을 나는 그저 마음의 변덕처럼 여겼다. 혹은 나약함이라던가. 하지만 내가 여러 번 다짐하고 선언했던 말과 다르게 이면에서는 이탈한 그 궤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는 걸, 기도 중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며 꿰뚫어 보게 되었다.
아, 내가 그랬구나.
알지 못했으며 모른 척하고 있던 내 마음의 흔적들을 주워 담았다. 외로움, 배신감, 슬픔, 기쁨, 아픔 등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마주 봤듯이 이번엔 두려움을 오롯이 느꼈다. 느끼지 않으려고 틀어막고 있던 감정이 나를 통과할 때면 늘 그렇듯 눈물이 흐른다. 진작에 흘려보냈어야 할 것들이 뒤늦게 밀려와 콸콸 쏟아지는 것이다.
너무 두려워요.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걸까 봐. 그 평가는 오롯한 내 시선도 아니고 알 수 없는 외부의 기준일 뿐인데. 내가 실패할까 두려워서, 이미 벗어난 궤도인 걸 인정하는 척하면서 실은 외면했어요 ⸻하고, 말하지 못했던 깊은 속마음을 그제야 기도로 바꿀 수 있었다.
하염없이 드러낸 마음. 그 앞에 후련해졌다. 몇 년간 반복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아는 척, 또 아닌 척했던 것들로부터 휘둘리지 않을 희망이 비치는 듯했다. 왜냐하면 이제 정말 외면할 수도 없이 알아버렸으니까. 두려움 속에 풍덩 발을 담가버리고 있는 대로 느꼈으니까. 감정을 비껴서 하는 불완전한 아는 척은 버리고, 감정을 직접 겪어 살아내기 시작했으니까.
‘두려워하는 거 알아’가 아닌
‘두려워’.
감정으로부터 거리 둔 말이 아니라, 감정을 진실되고 용기 있게 몸소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뻣뻣한 갑옷 때문에 기도할 수 없던 날들을 지나, 벌거숭이가 되어 기도할 수 있는 날로 나아간다. 성공적으로 그럴듯하게 사는 게 아니라 정직하게 통과하며 사는 삶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인간답고 진실한 삶으로.
언제 다시 또 옷을 입고 가면을 쓰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에 한 꺼풀 옷을 걸쳤을 때. 그때, 그 옷의 무게를 알아차릴 만큼 솔직하고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투명하게 감각하는 마음을.
어쩌면 나에게 예술은 정금 같은 삶을 만들기 위한 방법일 뿐인지 모르겠다. 정말로,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