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을 마주할 때 반짝이는 조약돌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자꾸 눈길이 가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듯 말을 그렇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라, 반짝이는 조약돌이 그러하듯 그 말이 아름답고 생동적이어서 그렇다.
찬란함, 강인함, 우아함, 섬세함.
내가 조약돌처럼 보고 있는 이 말들은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 예술》 1장 내용 중 역자가 ‘질성’ 개념에 붙인 각주에서 나온 단어들이다.
[역주] 여기에 나오는 ‘질성’이라는 말은 듀이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질성이나 ‘제 2성질’에 나오는 ‘성질’은 모두 quality의 번역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로크는 직접적 감각에 의해 사물로부터 직접 받아들이는 것으로 제 1성질과 제 2성질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 1성질은 수량, 크기, 모양, 무게, 운동 등과 같이 대상이 지니는 객관적 특성들로서 측정가능한 것들을 가리킨다. 제 2성질은 소리, 색깔, 냄새, 맛, 촉감과 같이 사물에 생동감을 주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감각적 특성을 가리킨다. 20세기에 제 3성질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 3성질은 찬란함, 강인함, 우아함, 섬세함 등과 같은 특성으로 경험자가 대상을 직접 지각할 때에 일종의 느낌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듀이가 예술적 경험과 관련하여 언급한 quality는 이하 이 글에서 분명해지겠지만 제 3성질과 유사한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전통철학에서 언급하는 quality를 언급할 때는 듀이가 염두에 둔 quality와 구별하기 위하여 제 1성질 또는 제 2성질처럼 ‘성질’로 번역한다. 그리고 듀이가 말하는 quality는 ‘질성’(質性)으로 번역한다.
…대상의 특성으로서 질성은 경험상황에서 경험 당사자가 직접 포착하는 것으로, 그 경험상황만이 가진 고유하며 독특한 성질을 의미한다.
『경험으로서 예술』, p.42-43
찬란하다, 강인하다, 우아하다, 섬세하다— 이런 느낌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도(제 1성질) 없고 주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감각적 특성(제 2성질)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것들은 있다. 사물, 맥락, 감정, 행위, 의미가 겹겹이 포개져 만들어내는 분위기,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단순하게 쪼갤 수 없는 특유의 경험으로 있다.
찬란함, 강인함, 우아함, 섬세함. 그리고 쓸쓸함, 따스함, 음울함, 의연함, 황홀함, 경외감… 객관도 주관도 아닌 어딘가에 놓인 말들. 분명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찬찬히 굴려보면 말 자체로 힘을 느끼게 된다. 언어로 어떤 느낌과 경험을 100% 전사하듯 옮겨낼 수 없지만, 그 ‘옮길 수 없음’ 때문에 생기는 힘인 것 같다.
인간의 사고는 종종 말 안에 갇힌다. 그러나 어떤 순간엔 말이 다 채우지 못하는 빈 공간을 느끼고, 그 자리를 넘치게 메우는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빈자리는 몸소 겪어야만 채워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누군가 바다 너머로 지는 해를 말로 완벽하게 전할 수 있고, 또 피아니스트의 연주마저 그대로 설명해 낼 수 있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바닷가에 갈 필요도, 공연장을 찾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붉게 번지는 하늘, 건반 위에서 일렁이는 피아니스트의 손끝까지 말만으로 충분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노래할까. 왜 그림을 그리고, 왜 달리고, 왜 여행을 떠날까. 왜 그렇게 웃고 울고, 아파하고 또 즐거워할까. 왜 그렇게, 왜. 말로 다 할 수 없으니까. 말이 있기 전에, 말이 있고서도 표현할 수 없는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가장 정확한 말은 언제나 가장 작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반짝이는 조약돌 같은 말은, 언제나 빈틈이 있고 그래서 커다랗다. 언어 바깥을 비춘다. 어쩌면, 답답해하던 언어의 한계가 언어의 가장 강력한 능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