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에 끌리는 이유와 깨달음

by 안혜빈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리고 싶다’는 말은 대개 ‘그리고 싶은 대상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떠올릴 수 있고, 그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

그림에서 ‘무엇’을 그려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자주 멈칫거리곤 했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또 손바닥만 한 드로잉부터 큰 캔버스에 이르기까지 흰 바탕 앞에서 주저함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그 주저함을 실력 부족이나 게으름, 혹은 완벽주의에 의한 백지 공포증으로 설명해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항상 남아 있었다.

나는 그리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싶은 ‘상태’는 있었지만 그것을 대표할 이미지가 없었을 뿐이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데, 나에게 대부분의 대상은 늘 임의적이었다. 무엇을 그리든 간에 대상이 되는 그것을 반드시 그려야 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은 스스로를 애매하고 그릴 자격 없는 사람처럼 여기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나의 부족함이 아니었다. 애초에 어떤 대상을 찾거나 정해두고 그리는 방식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표현하기 위해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늘 붙잡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대상으로 대신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어떤 감각, 어떤 상태. 그것은 경험될 수는 있어도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무엇을 그리는가,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 질문의 구체적인 ‘무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지만 아니었다. 더불어 세상에 새로움을 선보이거나 강력하게 주장하기 보다, 나는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원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설치 작업에 가장 큰 흥미와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치는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은 채 공간 안에서 먼저 경험으로 펼쳐지는 작업이니까. 그러니 이제까지 무엇을 시도하든 쉽게 답답해지고 질렸던 시간들이 이해된다. 그건 방황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한 추상을 향해 계속 어긋난 시도를 반복하던 것이었다. 너무 구체적인 것들 속에서 맞지 않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필요했다.


추상은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대상을 정하라고 하지 않고, 굳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이해와 해석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두게끔 허락한다. 나는 그 방식이 간절히 필요했고 또 그 언어를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추상에 끌리는 이유. 단순한 선택이나 취향 혹은 표현의 문제라기 보다, 나 자신이 무엇을 발현하고 싶은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나에게 ‘무엇’이란 명사에 해당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저 이미지 이전에, 언어 이전에, 해석 이전에 있는 어떤 상태를 고스란히 마주하고 싶을 뿐이다.

비로소 추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예감이다.


LIGHTFALL, 202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