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알레고리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순간 작가가 독자를 정해둔 답으로 이끈다고 봤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에 대해 알아볼수록 알레고리가 얼마나 매혹적인 도구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가 분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A라는 이야기가 있을 때, A=B라고 깔끔하게 못 박고 싶은 욕망을 해결해 주는 게 알레고리이니 말이다. 주관이 확실하게 서지 못하면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알레고리의 유혹을 받기 쉬울 것이다. (구분하는 기준에 의하면 알레고리는 조금씩 다르게 설명된다. 헷갈리고 어려운 개념이지만 여기서 나는 알레고리의 엄밀한 개념 정의보다는, 알레고리가 적용될 때 작품 경험과 해석의 닫힘/열림 차이 정도로 이야기해 보겠다.)
시인 존 키츠가 ‘부정적 수용능력(소극적 수용능력)’에 대해 언급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짐작해 본다. 키츠가 말하길 부정적 수용능력이란 ‘불확실함, 신비, 의심 속에서도 사실이나 이성에 안달 나는 집착 없이 머무르는 능력’이다. 이전에 나는 부정적 수용능력을 삶의 태도로 확장해 글을 썼는데, 키츠가 문학 속 위대한 인물—특히 셰익스피어—의 특성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음을 다시 짚어보면 부정적 수용능력이란 문학과 예술에서 일종의 알레고리를 탈피하는 것, 또는 그런 비슷한 상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 말했듯 알레고리는 불확실함이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할 때의 결과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만큼 무엇이 어떠하다고 정의 내리고 설명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넘어선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속 인물이든 심리든 상황이든 A가 단순 B라고 결론을 짓지 않은 상태를 견디면서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힘이란, 한 마디로 작가의 정신적 지구력인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 지구력을 가진 사람들은 서두에서 언급한 톨킨은 물론 키츠가 말한 셰익스피어가 있겠고, 또 하나의 예시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클레어 키건을 들고 싶다. 클레어 키건 같은 경우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은 글로 분위기나 감정을 오히려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평가된다.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거나, “애써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의 지력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암시로도 충분히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확고한 태도가 느껴진다.
정리하자면, 이 사람들은 의도한 바를 설명하듯 정해두고 말하지 않는다. 보여준다.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감상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솔직히 나는 이전까지 작업할 때면 자각하지 못한 채 알레고리적 선택을 하곤 했다. 이유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알레고리를 설계하고 설명한다 한들, 의도 그대로 전달된다기보다 엉뚱하게 읽히는 게 현실인데 말이다. 그러나 오해나 오독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알레고리적 작업이 반복되며 진행될수록 스스로가 어딘가 갇힌 듯 갑갑함을 느꼈다는 데에 있었다. 창작자가 그럴진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경험적으로 느끼기에 창작에서 알레고리를 벗어나려 할 때, 창작은 순식간에 믿음의 행위로 전환되는 듯하다. 창작자 자신을 믿고, 작품을 믿고, 그것을 읽고 볼 사람들을 믿는다. 오해와 오독당할 것을 감수한다. 창작자가, 창작한 것에 대한 통제를 버리는 아주 용기 있는 결단. 작품 속에 사람들이 마음껏 방황하고 경험할 자유를 남긴다. 그런 중 누군가 그 안에서 보게 될 것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작품을 다른 이들 품으로 건네보낸다.
이것은 추상과 맞닿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호하며 구체적이지 않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나는 작품 안에서 어디까지 말하지 않고, 언제까지 열어둔 채 견딜 수 있을까.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들의 믿음과 강인한 인내에 감화된다. 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