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외국어 습득을 위한 듣기에 앞서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동기'와 '지속'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 동기를 가지고 지속하기만 한다면, 흘려듣기는 효과가 있을까?
'외국어'라는 단어를 두고, 현재 아이가 홈스쿨링의 형태로 무언가를 하고 있든, 학원을 다니고 있든, 혹은 학습의 형태는 전혀 배제한 채, 모국어 습득 방식의 노출을 추구하고 있든, 많은 부모들은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는다. 그리고 그 의구심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주변에서 하라고 해서, 하기는 하는데요. 이렇게 영어만 계속 틀어주면, 언젠가는 귀가 뚫릴까요? 아이가 제대로 듣는지도 모르겠고.. 흘려듣기가 효과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효과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설령, '동기'를 갖고 지속했을지언정 말이다. 주변에 CNN 10년 들었는데, 귀가 뚫리지 않았다는 사람들을 마주친 적이 있는가? 나 역시 그런 증언을 수없이 들었다. 영어 뉴스를 계속 틀어두면, 미드를 자막 없이 계속 시청하면, 외국만 나갔다 오면 귀가 뚫릴 줄 알았다는 증언들. 그 시작 시기가 어렸을 때(미취학 연령, 혹은 초등학생 시기)라고 할 지라도, 예외 없다. 어떤 자료로, 어떤 밀도로,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가령, 나는 스스로 동기를 갖고 지속적으로 영어 흘려듣기에 10년가량 노출된 셈인데, 내가 영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알았다. 그 전에는 영어로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차곡차곡 쌓아만 둔 셈이다. 반면, 같은 방을 공유하며, 영어 흘려듣기에 10년 이상 노출된 내 동생은, 동기는 전혀 없었으나, 수능 영어 듣기 정도는 문제없이 해결했다. 단, 영어로 말하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의 듣기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 다른 주변인의 사례로, 나의 남편은 학창 시절(아마 6년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매일 밤 AFN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영어가 목적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그의 영어 귀 역시 뚫리지 않았다. 대학 시절 토플 및 아이엘츠 고득점으로, 당시 다녔던 학원에서 수강료 전액 환급까지 받았다는 그가, 영어 듣기는 힘들다고 한다.
무슨 이유일까? 크라센 교수의 입력 가설(Input Hypothesis)에 따르면, 입력(Input)만으로 다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을 충분히 차고 넘치게 듣고 읽으면, 언젠가는 귀가 뚫리고, 말(speech)은 자연스럽게 발현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어 뉴스 10년 듣고도, 귀가 뚫리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점은, 단지 그들이 외국어 습득을 위해 선택한 자료가,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의 범위를 넘어서, 즉,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자료를 선택한 우를 범했기 때문만이었을까?
크라센 교수의 입장이 언어 습득에 있어서는 인풋이 전부다,라고 한다면, 또 다른 학자 슈미트는 주목 가설(Noticing Hypothesis)을 내놓기도 한다. 들어온 언어 자극이, 언어 학습자에게 있어서 주목(noticing)되지 않으면, 습득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특정 요소에 주목한다고 해서, 바로 습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 자극에서 무언가를 주목 하였는가, 알아차렸느냐의 여부는,언어 습득에 있어서 중요한 시작점이 된다고 말한다.물론, 슈미트의 주장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 반박 첫 번째, 정보 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에 따르면, 어떤 요소에 '주목'한다는 자체가 정신의 처리 공간을 차지해 버리므로,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습득'이 아니라, '학습'이 되어 버린다. 반박 두 번째, 사용 기반 이론(Usage-Based Theory)의 관점에 따르면, 습득은 학습자가 주목하거나 인식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빈도(frequency)', 즉, '얼마나 특정 표현에 자주 노출되었는가'가 결정한다고도 했다.
어떤 입장이 더 신빙성 있느냐의 갑론을박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되, 내 아이의 언어 습득을 돕고자 하는, 현실 육아 속 부모님들에게는 각각의 의견들이 다 귀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나의 경우에는 다량의 인풋과 함께, 필요시 특정 요소에 주목할 때, 습득과 학습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느꼈고(크라센 교수는 습득과 학습, 이 둘 사이에는 교집합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특정 표현을 다양한 맥락에서 복수의 회차로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내재화되는 경험도 했다.
따라서 현재 이 방법 저 방법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는 부모들의 입장이라면, 우리 옆집 아이의 사례만을 따라 하는 것보다는, 학계의 다양한 의견들을 고려 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이론을 실제 적용해 보기로 하자. 아이와 성인의 적용은 살짝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미취학 아동, 초등 저학년에게의 실제 적용
먼저,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내 아이에게 힘든 학습이 아닌, 최대한 습득에 가까운 환경을 조성해 주고자 마음먹고, 흘려듣기를 실행하고자 하는 부모님들이라면, 선택하는 영어 자료가, 아이가 이미 영상으로 1회 이상 시청해서 내용을 알고 있거나, 그림책으로라도 접해 본 적이 있고, 당연하겠지만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내용이 좋다.여기에 더해, 아이가 영상의 대사를 따라 하고 싶어 한다 거나, 영상이 너무 재미있어서 내용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케이스라면 더욱 바람직하다.가령, 그림책 혹은 영상의 형태로 접한 페파 피그 특정 회차를 흘려듣기 해본다. 동일한 회차의 내용을 영상+그림책+흘려듣기로 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2. 초등 고학년 이상, 성인에게의 실제 적용
초등 고학년 이상의 아이이며, 청소년용 원서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의 수준이 된다면, 이미 1회 이상 읽은 책을 흘려듣기 하면 좋다. 반드시 푹 빠져서 읽은 책이어야 한다. 재미 없는 책을 흘려들으면, 소음공해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도, 언어 습득 촉진을 위해서라면, 책 한 권을 통째로 흘려듣기 하는 것보다는, 책의 일부(가령 책의 전반부, chapter1, 실력이 좀 더 늘면 chapter1&2의 방식으로)를 흘려듣는 편이 낫다. 이 외에도, 한 번 본 영화를 흘려 듣기, 흘려듣기 전/후로 영화 시청만으로는 놓쳤던 대사 확인 등의 능동적, 자발적 알아차리기의 순간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나 역시, 수년을 (학창 시절 10년 미만, 성인이 된 이후 또 10년 이상) 흘려듣기 해 봤고, 효과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음을 직접 체험했다. 유아 시기인지, 초등 저학년 시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나의 수준 및 취향에 맞지 않았던 쎄써미 스트리트 영상을 보며,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 저학년 무렵 몇 달 간, 교포 아주머니 한 분의 가정 내 스피킹 클래스에서 친구들 몇몇과 롤플레이(역할극) 등을 했던 듯 한데, 어떤 영어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재미 있었다는 정서는 기억에 남는다. 초등 고학년 시절부터 중학생 때는, 영화와 팝송에 빠져 살았다.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법은, 이동 중에 혹은 아침 시간, 학교 갈 준비를 할 때, 이미 1회 이상 푹 빠져서 본 영화를, 소리로만 배경 음악처럼 틀어 놓으며, 다시 한번 영화를 감상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추후 대본을 확인하며, 내가 놓쳤던 부분을 확인하는 방식을 거쳤다.
성인이 된 현재, 운전 중에,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음성 서비스인 오더블(Audible)을 틀어 놓기도 한다. 오더블 사이트에서는, 뉴욕 타임즈 기사 요약을 음원으로 제공하는데, 귀로만 들으면 딱히 남는 게 많지 않다. 왜냐? 시사용어는 둘째 치고서라도, 한국의 소식이 아닌 외국의 소식이므로 우선 나의 일차적 관심 분야를 벗어났으며, 외국 뉴스를 듣는 목적은 필요한 정보 캐치에 불과한데, 필요한 정보만 얻으려는 목적의 듣기에는 크게 몰입이 되지 않는다. 같은 오더블(Audible)의 소리라도, 내가 한 번이라도 집중해서 읽었던 책(가령, 현대 소설)의 경우라면, 몰입해서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슈미트의 주목 가설(Noticing Hypothesis)은 아이보다는 성인에게 더욱 시사점이 크다고 본다. 성인이 되어서, 습득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적 학습은 배제한 채, 어린아이의 방식대로 다량의 듣기와 다량의 읽기만 하는 방식으로는 언어 실력 향상이 굉장히 더디다. 그냥 듣기만 한 사람보다는, 받아쓰기 등의 과정을 거쳐가며,혹은 본인 음성 녹음을 통해 원어민의 실제 발화와 본인이 이해한 바의 차이, 원어민 화자와 본인의 발화의 차이를 확인하고, 의도적 학습의 과정 역시 거쳐간 사람이 더 빨리 영어 실력이 상승한다.
사실 우리 각각 아이들의 뇌 속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뇌과학자가 아닌 이상 명확히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방식의 흘려듣기를 하면서도, 누군가는 제대로 몰입해서 내용(message) 그 자체에 푹 빠져서 언어의 형태나 구조에 대한 습득은 저절로 따라오고 있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책도 읽고 있고, 그 책에 해당하는 음원 파일을 듣고는 있지만 책 읽기도 크게 의미 없는 눈 운동에 불과했으며, 책의 내용 듣기 역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단지,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내 아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민하게 파악하여, 아이가 흥미를 가질만한 콘텐츠(영어 영상이든 책이든)를 제공해 주는 것, 편안한 정서를 제공해 주는 것, 여기까지다. 아이의 발화를 도와주기 위한 노력들은, 그다음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