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윤리학 11장
앞서서 나는 나의 자아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최대한 나의 좋음과 싫음을 명석판명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나의 이성이 원하는 바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의 자아는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느낌을 느낄수록 좋음을 느끼며,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느낌을 느낄수록 싫음을 느끼는 듯하다.
물론 존재의 증명을 통해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노력> 파트에서 존재의 증명을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의 자아가 특히나 ‘존재의 증명’이라는 사슬 속에 종속되어있다는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두 번째로 지금껏 나는 한 번도 순수하게 자기 보존에 한하여 나의 자아가 존재의 증명에 그러한 종속적인 관계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점에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무지로 인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오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나의 지금까지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의 이성이 요구하는 바(=존재의 증명)을 파악하지 못함.
2. 나의 자아 (좋음, 싫음)을 명석판명하게 알지 못함.
3. 그러한 무지 속에서 막연한 불안, 공포, 우울감이 높았고,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모름.
4. 수동적인 상관관계의 증가, 비효율적, 비효과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한 존재의 증명의 지속 (ex. 남에게 나의 존재의 증명을 위탁)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재 나는 이제 1번과 2번은 자아의 <인지, 이해>와 <연구> 파트에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나는 나의 존재가 고양되고 느껴질 때 행복함을 느끼며, 나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느껴질 때 싫음을 느낀다는 것을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는 외부 사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노력> 파트에서 해야 할 것은 3번과 4번을 위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번과 2번을 해결했다고 3번과 4번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나의 이성이 말하는 것이 ‘존재의 증명’이라고 스스로 어느정도 파악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나의 좋음과 싫음을 명석판명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매우 추상적인 부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방금 말했듯이 “나는 나의 존재가 고양되고 느껴질 때 행복함을 느끼며, 나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느껴질 때 싫음을 느낀다”라고 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내 삶 속에서 나의 존재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증명을 해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즉각적으로 막연한 공포와 불안, 우울감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실제로 내가 ‘이성의 목소리’를 어느정도 파악했을때, 막연한 공포와 불안, 우울감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으나, 아예 없어진다는 느낌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는 나를 둘러싼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우울감을 떨쳐내고 효율적, 효과적, 지속적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의 기초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나의 생각을 피력해왔다. 「자아」 파트와 「상호작용」 파트에서 나는 능동적인 상호작용과 수동적인 상호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행복은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 행복은 언제 발생하는가? 행복은 좋음이 높고 싫음이 적은 상태이다. 그러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 왜냐하면 능동적인 상호작용은 자아의 싫음을 줄이고 좋음을 높이며, 수동적인 상호작용은 대개 자아의 좋음을 줄이고 싫음을 높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자기윤리학 8장)」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을 위해선 물질적, 정신적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동시에 요구로 한다. 그러나 비중을 둔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능동적인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적 기제는 방대하기 때문에 자아가 줄 수 있는 영향은 당연히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자기윤리학 8장)」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능동적 상호작용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현실적이다. 「상호작용(자기윤리학 8장)」
노력은 자아를 둘러싼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상관관계의 절대적인 개수를 늘리는 것을 노력하는 것과 상관관계를 표상하는 방식을 (능동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것, 두 가지의 노력이 존재한다. 전자는 미래에 대한 노력이고, 후자는 과거에 대한 노력이다. 「자아(자기윤리학 9장)」
즉,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란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늘리는 것이다. 나의 노력은, 나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늘릴수록 나는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 지속가능하게 나의 자아를 증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앞서 「자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이는 <과거>와 <미래>로 나뉜다.
<과거> : 구체적으로 나를 둘러싼 과거의 상관관계들을 나의 존재를 고양하는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표상하도록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뚱딴지같은 소리같겠지만) ‘나의 존재가 세상에 나타난 사건’인 나의 출생부터 시작해보자. 보통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출생의 주체는 나의 어머니이다. 한 드라마에서 ‘왜 어머니는 나를 낳았냐’라고 불만을 내는 여배우를 보았다. 나 또한 지금까지 나는 이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다르게 표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기까지 무수히 많은 외적인 상관관계들이 있었겠지만, 결국 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한 주체는 ‘나 자신’이다. 다시말해 수많은 정자들 속에서 ‘나’라는 하나의 정자가 오직 스스로의 존재 유지를 그 목적으로 하고 난자를 향해 나아가지 못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기억과 경험을 매개로 하는 수많은 과거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는 지금 나의 이성의 목소리(존재의 증명)을 기준으로 나의 기억과 경험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표상해나가는 것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과거>를 나의 존재의 증명의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미래> :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외부 사물에 어떻게든 티끌만큼이라도 영향을 준다. 나의 존재가 없으면 그러한 영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는 나의 미래의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필수조건인 셈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많은 상관관계를 만들어낼수록 나의 존재는 고양한다. 예컨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집 앞에 길고양이들이 먹을 수 있는 먹이를 나둠으로써, 나는 고양이들에 대해 능동적인 상관관계를 만들어낸다. 어떻게 보면 자식을 낳고 나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 또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능동적인 상관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상호작용」파트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이 또한 중요한 것은 표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을 위해선 물질적, 정신적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동시에 요구로 한다. 그러나 비중을 둔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능동적인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적 기제는 방대하기 때문에 자아가 줄 수 있는 영향은 당연히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을 수 없다. 나는 내 여자친구의 성격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내 직장 상사를 바꿀 수 없다. 물질적인 능동적 상호작용은 그 비중을 많이 높일 수 없다. 물론 노력하면 높일 수 있다. 예컨대 나의 신체를 단련시키거나, 혹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돈을 열심히 쌓으면 물질적 능동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자기윤리학 8장)」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 결국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부분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억만장자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더라도, 스스로의 존재증명에 대한 표상의 방식이 소홀하다면 그는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외부의 사람들을 통해 나의 존재의 증명을 해왔고, 그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렇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부의 사람들과 나를 차단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부 사물이 없으면 나의 존재의 증명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듯이, 외부 사물과의 상호작용방식을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존재의 증명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외부사물을 자아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도록 나는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덧붙여서 표상을 노력하고 훈련하는 방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x를 하지 않으면 존재의 증명을 할 수 없어! (~x -> ~존재의 증명) 가 아니라,
x를 하면 존재의 증명을 할 수 있어! (x -> 존재의 증명)
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x를 통해서가 아니라 y나 z를 통해서도 나의 존재의 증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x 뿐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증명에 도움을 주는 y, z 등의 존재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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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교육 끝>
마지막으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는 이 시를 매우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해야 나는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매우 매력적이고 서정적인 시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기에 내가 하나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타인이 나의 존재를 규명해주어야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존재가 되어서 다가가 주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나를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내가 스스로 꽃이 되어 남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