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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원 Nov 16. 2022

싫음에 대해서

자기윤리학 2장

< 나의 자기이해 2 : 싫음에 대해서>


두 번째 자기이해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싫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요즈음 많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싫어하는 것(혹은 사람)’ 또한 늘어나고 있다.


1. 싫어함과 나쁨

‘싫어하다’는 ‘좋아하다’의 반대로 보통 쓰인다. 한자로는 好(좋을 호)의 반대말로 惡(싫을 오)가 쓰이는데, 여기서의 ‘惡(싫을 오)’는 ‘나쁘다(악하다)’와 ‘싫다’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보통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자가 정의가 되었다는 생각이든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싫어하는 것은 惡(악) 이며 그렇기 때문에 배척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렇지 못하면 버틴다.

그러나 이러한 惡(악)과 같은 싫어함은 인간의 필수적인 감정이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아함과 동시에 항상 겪어야하는 필연적인 감정이다. 오히려 오늘날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싫어한다는 감정을 더 자주, 그리고 깊게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싫어함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대처를 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즈음 든다.


2.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 이유

내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만약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에 대한 이유는 많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예컨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특성이 나랑 잘맞고, 취미가 같고, 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왜 그러한 이유가 발생하였는지까지 종종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를, 무언가를 싫어할 경우 그것의 이유에 대해서 보통 우리들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를 싫어할 경우,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싫고, 그 사람에게 모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러할 것이고, 무언가를 싫어할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못지 않게, 무언가를 싫어하는 것 또한 항상 이유가 존재한다. 아울러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부터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대게 나로부터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고 가정할 경우, 보통 그 사람의 외모가 마음에 안들어서,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서, 마음가짐이 마음에 안들어서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 사람의 외모가 마음에 안드는지, 행동이 마음에 안드는지, 마음가짐이 마음에 안드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깊게 파고들 경우 결국은 나의 과거의 경험 내지 확고한 인식으로 인해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 속에 있다는 것이다.

흔히 싫어한다는 감정의 하위감정으로 역겨움과 증오를 넣는다. 그런데 사전적으로 역겨움을 설명하는 말이 재미있다. 사전에서 보니, 역겨움에 대해서 부제로 ‘의도적인 조절이 쉬운 감정’이라고 해놓았다. 그 이유는 역겨움의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인끼리 키스를 할 때 침을 교환하는 것을 즐기지만, 만약 입 밖으로 나온 침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역겨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악취의 경우도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지만, 농업과 목축업 생활을 하는 에티오피아의 다사네치 부족에게는 악취는 단지 건기라는 시기를 알려주는 유용한 기능을 하는 요소일 뿐이며 오히려 그러한 악취를 반긴다고 한다. 건기에는 들판의 식물이 시들어 죽고 과일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싫어함이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느껴야하는 감정 중에 하나이고, 우리가 현대사회를 거치면서 점점 더 많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며, 동시에 ‘나의 내면’에 대해서 더욱 더 잘 알려주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3. 싫어하는 것에 대처하는 법

앞서서 싫어함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을 즐기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물로써, 생리학적,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싫어하는 감정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이라는 주장이 말이 안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싫어함을 살아가면서 항상,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마주쳐야한다. 어찌보면 싫어함을 마주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싫어함을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보통 인터넷에서 보면 싫어함을 대처하는 방법을 외적인 요소에 기반해서 찾는다. 예컨대, 무례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나보다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따져가면서 설명을 해놓는 책들이 있다. 물론 이렇게 대처하는 것 또한 배우면 좋은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대외적인 대처에만 그친다면, 우리는 ‘싫어함’이라는 감정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내가 그것(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보통 내 속에 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결국 내가 무언가를 싫어하면, 왜 그것을 내가 싫어하는지 되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온 사유방식이므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를 발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것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내 생각에는 첫 번째로, 그 싫어하는 이유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로, 그렇게 하면서 싫어하는 것을 무작정적으로 惡(악)으로 보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전과는 다르게 내가 싫어하는 대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앞으로 무언가를 싫어할 경우, ‘왜’라는 이유에 집중하여 나 자신을 더욱 돌아보도록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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