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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Jan 21. 2023

문득 떠오른 주소, Pounds씨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기억하기도 어려운, 기억해낼 필요도 굳이 없는 숫자나 지명 등이 어느 순간 머릿 속에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상황. 오늘이 그랬다.

뉴욕 숙소를 찾고 있다는 후배의 이야기에 옛날 출장 때 묵었던 호텔을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다.. 옛날 잠깐의 어학연수 시절 2주간 머물렀던 홈스테이 호스트 집이 떠오르며 궁금해진 것.

로체스터 근처 웹스터란 마을이었고, 골목이 무슨 나라 이름이었는데..기억을 더듬으며 구글 지도를 확대해본 순간.. 맞다,  Lithuanica lane! 표적이 좁혀질수록 어렴풋이 가려져있던 기억도 한꺼풀씩 벗겨졌다. 이제 남은 건 번지수. 아무 이유 없이 8이란 숫자가 또 떠올랐고, 구글 거리뷰를 뒤졌다. 미국 시골이 그렇듯 다 비슷비슷한 집들을  몇차례 왔다갔다 하다 마우스를 멈췄다. 이 집 같기도 한데..우체통을 확대한 순간 또 한번 유레카! 그래 81*번지. 맞다, 맞아.

1995년 12월이었으니 30년이 되어 가는데.. (굳이 시간 들여 찾아낼 필요는 없는 정보였지만) 내가 이런 신박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니.

집을 찾고 사진을 이리저리 보다보니 그집 식구들이 그리워졌다. 주소는 잊었어도 식구들 이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도날드 아저씨와 부인 마지, 큰딸 킴벌리, 아들 매튜, 그리고 6살짜리 막내딸 코트니.(당시 내 영어 수준으로는 가장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사람이 바로 코트니, 이 아이도 종일 나한테 붙어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졸라댔었다.)

이분들은 어떻게 지낼까. 부부는 살아계실까.. 별 생각없이 전체 주소를 구글에 옮겨 검색된 문서들을 한두개 들어가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그 주소에 누가 사는지 알려주는 사이트가 미국에 있더라. 들어갔더니 세상에..이분들이 아직도 거기 살고 계시네. 이름은 D***, M***이렇게 익명처리 돼있지만 성은 POUNDS라고 명시돼있다. 가족들 이름을 다 알고 있으니 이니셜만으로도 그분들이 맞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심지어 나이도 나온다. 당시 나이와 계산해보니 다 맞다)

2주간 잠깐 머물렀던 외국의 학생을 이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오늘 내가 그들의 집주소를 찾고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나는 방위 복무를 마친 뒤 복학하기 전 6개월의 시간을 이용해 미국 중부의 한 대학에서 어학연수중이었다. 그런데 12월 방학이 되면 미국 학생들은 전부 고향으로 가기 때문에 캠퍼스엔 외국 유학생들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 미국 전역에서 각 가정들이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2주 정도 이들을 호스팅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신청해 이 동네에 가게 됐고, 처음으로 미국인의 가정에서 머물게 됐다. 도날드씨는 학교버스 운전을 했고, 마지 아주머니는 간병인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해 2주간 무료로 유학생을 먹이고 재우고 구경시켜주고 한 것. 부부부터 아이들까지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었다. 이 동네로 가게 되어있던 날, 나는 보스턴에 있었는데 폭설이 와 비행기 일정이 꼬여버렸다. 도날드 아저씨가 공항에 마중나오기로 돼있는데 비행기가 언제 뜰지 알수 없는 상황.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연락할 방법은 보스턴 공항에 있는 공중전화 뿐이었다. 25센트짜리 동전을 수북이 바꿔 전화통에 넣어가며 마지 아줌마랑 몇번을 통화했다. 두번째 통화였나? 아주머니가 걱정말고 조심히 오라고 당부하며 한마디를 남겼다. "When you call me again, make it collect." 툭툭 돈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난한 유학생 부담 덜어주려고 그랬을 거라 생각하니 그 한 마디 배려, 마음이 참 고마웠다. 큰딸 킴벌리는 나에게 방을 통째로 내줬고, 모든 식구들이 내가 불편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게 대해주었다. 2주간 이 집에 머물며 미국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이렇게 건전한 중산층들일 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PC화면에 떠있는 그분들 이름, 그리고 괄호 안에 78, 73이라고 적힌 부부의 나이를 보니 마음이 휑하다. 나와 체육관에서 1대1 농구를 했던 매튜가 마흔살이라고 적혀있다. 스쳐만 가도 인연이라는데, 그리 따지면 이분들과 나는 이 넓은 세상에서, 외국 땅에서, 심지어 웬만해선 갈 일도, 아니 동네 이름을 입에 올릴 일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2주의 시간을 공유했으니 대단한 인연이다. 그 주소 그대로니 편지라도 써볼까 하다 접었다. 내가 그들을 떠올린 것처럼 그분들도 28년 전 이런 학생이 하나 있었지..어느 순간 떠올려준다면, 그러면서 좋은 기억으로 여겨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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