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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Feb 11. 2023

故김영희 선수에게

어린 시절, 낮시간에 TV를 틀면 농구중계를 심심치 않게 볼수 있었다. 이충희-김현준으로 대표되는 현대,삼성 구도도 유명했지만, 그 시절엔 오히려 여자농구가 더 인기가 많았다. 요즘 KLPGA가 훨씬 인기인 것처럼. 압권은 박찬숙의 태평양화학과 김영희의 한국화장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업계 최고 라이벌 대전인데다 화려한 박찬숙의 플레이, 여기에 잡으면 한 골인(한 경기에 52점을 넣은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희 덕분에 장충체육관은 늘 꽉꽉 들어찼다.

국제경기로 가면 더 흥미진진했다. 당시 중공에 214cm의 진월방, 소련에는 220cm의 세묘노바라는 센터가 있었다. 세 선수가 물고 물리는 경기는(항상 세묘노바의 압승이긴 했지만) 늘 장안의 화제였고 다음날 스포츠면의 단골 톱기사였다. 1984년 LA올림픽을 끝으로 김영희 선수는 코트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시사매거진 2580> 데스크를 맡던 시절, 김영희 선수의 근황을 소개한 기사를 봤다. 가슴이 지릿했다. 잘 나가던 운동 선수들이 은퇴한 뒤 사업을 하다 망하거나 술, 마약에 손대 패가망신 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접해왔다. 그러나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연금 20만원 받으며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 더구나 어렸을 때 코치들이 병이 있는 걸 알고도 키가 더 자라게 하려고 본인에게 말도 안 하고 치료를 못 받게 해 말단비대증을 방치했다는 대목에선 말문이 막혔다. 내 몸인데, 내 인생인데 본인만 몰랐다니.  

그 순간부터 농구선수가 아닌 김영희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워 떠받들어주며 환호하다 어느 순간 타다 만 땔감 취급받는 심정이란 게 어땠을까. 돌이켜보면 그 옛날 어린 나를 포함해 김영희, 진월방의 경기를 지켜본 관중들의 심리는 운동 경기보다는 곡마단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와~ 저 거인 보게, 우와~" 감탄하며.  데스크로서 이거 한 번 다뤄보면 어떻겠느냐 후배들을 슬쩍슬쩍 떠볼 때도, 2미터5센티나 되는 사람이 반지하방에 쪼그리고 앉아 양말을 기우고 살고 있다니 '기사도 되지만 그림도 되겠다'는 못된 생각을 그 순간에도 하고 있었다.

얼마전 조문주 선수가 작심하고 당시 감독들을 비판한 인터뷰 기사를 봤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릎으로 가격하고.. 맞지 않으려면 이겨야 했다고. 당시 맞은 기억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울부짖는 동료가 있다고도 했다. 누가 책임질 건가.

나잇살 처먹고도 여전히 선수들 때린 게 이기기 위한 신념이었다고, 심지어 선수를 위한 '사랑의 매'였다고 소위 그 시절 '회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몇몇 안다. 이 사람들은 죽을때까지도 용서받으면 안 될 거란 생각이 든다. 당신이 할 일은 회고가 아니라 참회다.

타인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됐던 인생 앞에서 '저세상에선 편하게 살길 빈다'는 기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선수를 속이고, 폭행하고, 유린했던 소위 '지도자'들, 영정 앞에 가서 머리 박고 조아리기 전에 제발 정신 좀 차리길 바란다.



#김영희 #코끼리센터 #한국화장품 #박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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