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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May 24. 2023

"일단 가려."

<방송국에 살다보면>

“일단 가려.”

#1. 가출 청소년 문제를 취재한 기자가 모텔촌 골목에서 멘트를 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하필이면’ 배경에 한 중년 남녀가 먼발치에 함께 찍혔고, ‘하필이면’ 그 남녀는 그 시각 거기 있어서는 안 될 소위 부적절한 관계였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격렬히 항의가 왔다. 아주 작게 찍힌데다 방송사에서 촬영 중인 것도 알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우리는 우리를 알아볼 수 있다, 촬영 중인 거 못 봤다’고 주장했고 결국 해당 화면을 다시보기에서 수정했다.

#2.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집회를 촬영했는데 막상 방송이 나가고 나니 왜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했냐며 자기 얼굴을 지워달란다. 여러 사람에게 부당함과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 ‘집회’ 아니었나. 그러면 집회는 왜 나오셨냐고 물었지만 요지부동. 권리는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지만 내 얼굴은 방송에 나가면 안 된다는 논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선 기자부터 데스크, 취재부서 부장, 편집부장, 편집부국장 기간 내내 골치아팠던 것 중 하나가 모자이크라고 편의상 많이 불렀던 바로 이 ‘흐림처리’였다. 무슨 기준으로 가리고 안 가릴지, 또 가리면 얼마나 세게 가릴지 사례마다 사람마다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사생활 보호, 인권이 강조되면서 관련된 언론중재와 소송 건수가 늘어났고, 자연히 흐림처리의 강도와 빈도도 함께 올라갔다.

이러다보니 ‘헷갈리면 일단 가리고 보는’ 걸로 분위기가 굳어졌다. 조금이라도 민감한 소재면 편집실에 기자, 편집자, 카메라기자, 데스크까지 삼삼오오 모여 혹시라도 ‘보이는 게 있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세상사 안 보이는 걸 보이게 하는 게 기자의 업인데.. 다 가리면 뭘 내보내나. 뉴스 리포트 2분 동안 기자 얼굴 한 커트 빼고는 전부 뿌옇게 나가는 경우도 속출했다.

급기야 가리지 말라는데 가려서 문제가 되는 일까지 생겼다. 10.29 이태원 참사 한 달 뒤 유가족은 기자회견에서 희생자 얼굴을 내보내는데 동의했는데 정작 5개 매체를 빼고는 모두 흐림처리했다.  

항의와 소송, 언론 중재 위험이 높아지다 보니 수세적으로(솔직히 말하면 안전한 쪽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진다. 나도 그랬다. 안 가려서 생기는 문제는 있어도 가려서 탈 나는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맞는 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뭐든 까서 보여주자는 게 아니다. 공개적인 집회에서 깨알만하게 찍혔는데 “그냥 싫다”며 지워달라는 요구는 과연 정당한가. 영화 시사회에서 반응을 보기 위해 관객석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일도 없어진지 오래다. 일일이 가리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뭘 위해 가리는지’는 우리 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편집부장 시절 어느 날, 보도국장이 아파트 공사현장 노동자 사망사고를 전한 전날 뉴스를 언급하며 왜 회사 이름도 안 밝히고 화면에서 로고도 지웠냐고 물었다. 나는 ‘시공사-시행사 책임 관계도 아직 덜 밝혀졌고, 뭐 소송 위험도 있고 해서 사회부에서 일단 안전하게 가자고 가린 모양입니다. 기준도 명확치 않으니..’라고 노회한 고참 공무원처럼 두루뭉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이 또렷이 기억난다. “어디에 물어본들 기준이 명확하게 있겠냐. 우리가 판단해서 여부를 정해야지. 그런 다음에 그 결과에 언론사가 책임을 지면 되는 거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정작 어느 회사 아파트인지만 쏙 빼놓는 게 정상인가.” 우리가 판단하고 정하고 책임진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맞는 말이었다. 물론 매일 살얼음판 위에서 분초를 다투는 기자들에게 가혹하고 힘든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래도 관행에서 한 발짝 벗어나 한번 고민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왜 가렸냐는 질문에 "소송 걸릴까봐요"외에 딱히 떠오르는 속시원한 대답이 없다면 초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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