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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Aug 23. 2024

'오프닝 건너뛰기' 유감

방송국에 살다보면


때로는 시각보다 청각이 강렬하게 각인된다. 이미지는 쉽게 잊혀도 익숙한 사운드는 죽을 때까지 간다. 나에게는 '프로그램 주제곡'이 그렇다.

시간 맞춰 TV를 보던 시절엔 오프닝 주제곡이 곧 프로그램 정체성이었다. 그게 나와야 프로그램이 시작한다는 뜻이었고, 제작진도 콘텐츠 이미지에 걸맞는 곡을 만들기 위해 대단히 공을 들였다. (최고의 자원과 요소들이 방송사로 몰리던 시절이니 가능했다. 수사반장 주제곡은 유명한 드러머 유복성씨의 작품이고, 어린이 드라마 '또래와 뚜리'의 오프닝곡은 무려 ‘비처럼 음악처럼’의 작곡자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내가 서너 살 아기였을 때, 화요일 저녁 갑자기 TV에서 "빠라바라밤, 빠라밤! 빠라바라밤, 빠라밤!" 수사반장 오프닝곡이 나오면 깜짝 놀라 울면서 방에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팔도강산의 사내아이들이 돋보기로 소파를 태우고 휴대용 칼을 들고 날뛰게 만들었던 ‘맥가이버’의 오프닝곡은 어떤가. 그 시절 아이들의 주말은 그냥 그 주제곡이었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타이틀곡을 들으면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고, ‘질투’의 주제곡이 나오면 내가 연애라도 하듯 가슴이 떨렸다.(많은 사람들이 오프닝곡의 전주 2초만 들어도 아, 질투! 할 것이다. 물론 시청률 덕도 봤겠지만, 이게 주제곡의 힘이다)

가장 그리운 건 <베스트극장>. 지금 들어도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감탄한다. <베스트극장>이란 제목과 정체성에 이보다 더 들어맞는 음악이 있을까 싶다. (타이틀 중간에 한 커트 등장하는 신인 시절의 최진실을 보면 눈물이 난다.) 우리가 이렇게 잘 만들어. 다 나와 봐!..자신감, 자존심, 직업의식, 장인정신 모든 게 가득 차있다. 나는 1분 남짓의 이 주제곡이 지상파 방송사의 화양연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는, 기다리는 게 낭비로 생각되는 요즘, 콘텐츠 시청의 영역에도 어느 순간 ‘오프닝 건너뛰기’라는 신박한(내가 느끼기엔 야멸찬) 기능이 자리잡았다. 자연히 주제곡이나 타이틀엔 공 들일 필요가 없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엔딩이 놓치기 아까운 요소인 것처럼 TV 프로그램에서 잘 만든 오프닝은 프로그램과 한몸이었다. 그저 옛날이 좋았다는 추억팔이 하자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콘텐츠를 보는 설렘과 기대, 이런 한 축이 리모콘 클릭 한 번으로 소거되는 것 같아 아쉽고 아깝다.


#베스트극장 #오프닝 #주제곡


https://www.youtube.com/watch?v=qiI1o2FTC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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