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던 끝에서 마침내 선택한 한 걸음
손에 쥔 건 약봉지였지만, 사실은 ‘멈춤’이었다.
몸이 먼저 무너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를 너무 오래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정신의학과라는 단어는 늘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그곳까지 갈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청에서 운영하는 1회 무료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냥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담실 의자에 앉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눈은 내 말과 다르게 움직였다.
말의 건조함과 눈물의 뜨거움이 서로 부딪혀 나는 어딘가 멈춰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담 선생님은 조용히 말했다.
“장기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날 이후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상담을 이어가지도 않았고, 나를 돌보지도 않았다.
퇴사를 하고 나니 하루가 너무 길었다.
날 찾는 사람도 없었고, 침대 밖으로 나갈 이유도 없었다.
이불속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다 보면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가 났고, 예민함은 매일 더 선명해졌다.
그러다 문득, 이 상태로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가야겠다.
하지만 막상 병원 앞에 서니 이상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정도 일로 여기까지 와서 치료를 받아야 돼?”
“혹시 돌려보내면 어떡하지?”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선 날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도망치는 나 자신이 더 이상 보기 싫었다.
결국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병원 현관문을 열었다.
설문지를 작성하고, 자율신경계 검사를 받고,
그제야 나는 진짜로 ‘나’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단 결과는 우울증.
처방된 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오는데
마치 손에 든 것이 약이 아니라 ‘참아온 시간’처럼 느껴졌다.
약을 먹으면 모든 것이 좋아질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급격히 흔들릴 때 그 폭을 조금 잡아주는 듯했다.
밤에 잠이 드는 것도 한결 수월해졌다.
그 정도면 충분히 고마웠다.
하지만 약은 완치가 아니라 ‘도움’ 일뿐이었다.
먹지 말라던 술을 마신 날이면 정신은 흐트러지고,
감정은 더 깊은 어둠을 향했다.
처음 만난 의사 선생님은 남자였다.
기계적인 질문, 매뉴얼대로의 상담.
딱히 나쁠 건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1년쯤 지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 집 근처에서 다시 병원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만난 그 의사 선생님이
결국 내 5년을 붙잡아 주셨다.
지금도 나에게는 기둥 같은 존재다.
돌아보면, 병원 대기실에서 울던 그날은
무너지던 내가 다시 살아나는 첫 장면이었다.
아파야 했던 시절이 부끄럽지 않다.
그 아픔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까.
그리고 나는 안다.
그때의 내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간 용기는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선택이었다는 걸.
“당신도 언젠가 문을 열어야 한다면, 부디 너무 늦지 않길. 그 한 걸음이 당신을 다시 살릴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