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두기의 효과

by 최용

한희가 방학을 맞아 25년의 끝자락과 26년의 초입을 춘천에서 보내고, 어제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딸아이가 떠난 방을 정리하다 문득,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속 대사가 떠올랐다.


“이제 망각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여행 가이드인 여자 주인공이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복귀하는 고객들에게 건네는 이 말처럼, 한희 역시 고향 집에서의 달콤한 ‘망각’, 푸근함과 나른함에서 깨어나 다시 혼자 견뎌야 하는 긴장감과 생동감의 현실로 돌아갔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사실 한희가 집에 머무는 동안, 나와의 ‘글쓰기를 위한 질문 주고받기’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에 온 딸이 그저 편안히 쉬기를 바랐고, 괜한 부담이 될까 싶어 애써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연재는 잠시 멈춰 섰다.


그런데 한희를 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질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공기 속에, 질문들은 이미 수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빠, 점심은 뭐 먹을까요?”
“교수님이 논문 방향 잘 잡았다고 답 주셨는데, 정말이겠지?”
“차 타이어 공기압 경고등이 떴는데, 이건 어떻게 하지?”


특히 계약 만료로 이사를 앞둔 한희의 고민은 묵직한 질문이 되어 반복되었었다.
“이 집은 어때요? 아래층에 식당이 있어서 너무 시끄러우려나?”
“여기는 베란다가 있어서 활용하기 좋을 것 같은데, 아빠 보시기엔 어때요?”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며 돌아보니, 그 수많은 물음표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딸아이의 ‘질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대화, 혹은 혼잣말쯤으로 여겼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는 분명했다.
나와 한희 사이에 ‘거리(Distance)’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에는 대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 거리를 쉽게 잊는다.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마치 공기처럼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눈앞에 책을 너무 가까이 대면 글자가 흐릿해지는 것처럼, 지나친 친밀함은 때로 상대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이번 연말연시, 한희와 함께한 시간은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걱정을 하든, 응원을 하든, 코칭을 하든, 대상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한 발 물러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떨어져 지낼 때는 보이던 것들이, 1일 3식을 함께하며 너무 가까워지자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저 ‘말의 되새김’이나 ‘투정’처럼 들리던 말들이,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니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이었고, 응원을 바라는 신호였다.


우리는 이런 신호를 자주 놓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이 거리(distance)를 지워버릴 때, 정작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는 보지 못한 채 관계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 거리(distance)의 미학은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하다.


내 감정과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관찰자가 된다. 그때서야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를 제대로 돌볼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스스로를 단단하게 재촉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면, 잠시 물러서 보자.
전체가 보이는 거리, 목소리가 왜곡되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해보자.


나는 지금 그렇게 해보고 있다.


한희를 보내고, 수요일 연재를 쓰며 비로소 한희가 남기고 간 질문들을 또렷하게 마주하고 있다.


응원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적당한 거리두기라는 사실을 체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