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안갯길을 걷는 나에게
최근에 재미있게 보고있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 속 대사 중 유독 내 마음에 와 닿아 오래 남는 대사 있다. 우울증으로 추측되는 증상으로 3년간 방 안에서만 지냈던 유미지가 자신의 방문을 나서며 읊조리듯 되뇌는 말,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가 그 대사이다. 이 짧은 한 문장은 마치 주문처럼 들린다. 이름 그대로, 알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유미지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오늘을 나름으로 살아내기 위해 방문을 나서며 하는 작은 다짐이자 용기의 언어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우리는 종종 어제를 후회하며 붙잡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지금 여기’를 놓쳐 버리기 일쑤다. 후회는 우울이 되고, 걱정은 불안이 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언제 쓰지?", "잘 써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이 가득 찼었다. 생각은 행동을 밀어내고, 가능성은 두려움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들은 사라진다. 한 단어를 쓰면 한 문장이 따라오고, 한 문장이 쓰이면 다음 문장이 시작된다. 막상 시작하면 쓰게된다. ‘아직 쓰지 않은 문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지금 쓰는 문장’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일상 속에서 늘 시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춘천의 안갯길이다. 계절이 바뀌는 봄과 가을, 자신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춘천에는 짙은 안개가 자주 낀다. 나는 서울로 강의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차를 몰고 안개 낀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 길 위에서 나의 정서는 복잡하다. 짙은 안개로 5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때면 본능적으로 초집중을 한다. 그리고 과연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크게 집중하는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필요한 운전이다. 더 멀리 보려고도 않고, 보이는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집중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된다.
안개는 시야를 가리지만, 고맙게도 내비게이션은 말해준다. "맞게 가고 있다"고.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길은 이어지고 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삶과도 닮아 있다. 오늘이 안개 속 같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집중해서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집중하고 살아내다 보면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존재인 가족, 친구, 스승, 혹은 내면의 소리가 조용히 말해준다. “괜찮아, 잘 가고 있어.”라고.
삶은 자주 안갯속 같다. 확신보다는 불확실함 속에서 걸어야 하고, 명료함보다는 혼돈 속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그 안개 속에서도 우리는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더디더라도 계속 가고 있다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 문제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보면, 그 생각은 행동을 마비시키고 오늘을 잃게 만든다. 반대로, 작더라도 행동하면 생각은 따라온다. 움직이는 몸이 멈춘 마음을 깨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말은 오늘이라는 시간의 본질을 찌르는 말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기억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상상이다. 우리가 진짜로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오늘’ 하나뿐이다. 그 ‘오늘’도 이미 과거가 되어 가고 있으니,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다. 안개 속에서 5미터 앞만 보고 운전하듯, 보이는 만큼만 집중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방문을 한 걸음 나서는 것, 한 문장을 써보는 것, 노트북의 전원을 키는 것. 그런 작고 사소한 행동이 오늘을 살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쌓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안개가 걷힌 길로 꽤 멀리 걸어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이라는 안갯길에서 너무 멀리 보려고 애쓰지 말자. 지금 여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집중하자. 그것이야말로 불안한 미래와 후회 가득한 과거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테니까.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주문처럼 속삭여보자.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그렇게 한 발만 내디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