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밥만큼 맛있는 것은
우리 가족의 조금 속상한 역사
둘째가 태어나고 만 7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은 먼저 괌으로 갔다.
젖먹이 때부터 필수 영양소를 몸이 스스로 저장할 수 없고, 기관지가 약해서 잦은 병치레로 고생을 많이 했던 우리 첫째. 게다가 아이가 막 뛰기 시작할 무렵부터 알 수 없는 피부병이 생겼다. 아이는 대학병원에서 수십 통의 피를 뽑았고, 생살을 도려내어 조직검사를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증상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기록하기 위해 차가운 방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사진 찍혔다. 그 방에 엄마는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는 애처로운 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리 없는 눈물을 삼켰다. 사진 찍는 건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그냥 너의 몸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선생님이 잘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수백 번 설명을 했지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겐 엄마와 떨어지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었다.
아이는 한동안 사진 찍는 것을 너무 싫어했고, 나는 그때 임신 중이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많이 했지만 아이의 병명은 여전히 '원인불명'이었다. 낙담하고 있을 때 아시는 의사 선생님의 소개로 찾아갔던 저명한 피부과 원로교수님께서 공기 좋고, 덥고, 습한 곳에서 아이를 키우면 나아질 거라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괌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산'과 '조산으로 인한 둘째의 뇌출혈'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아빠가 먼저 이주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때를 기점으로 3년을 떨어져 살았다.
비록 괌이 워낙 가까운 데다, LCC(저비용항공사)가 활약해준 덕분에 우리 가족은 무리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날 수 있었지만, 분명 아빠의 빈자리는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꿔준 것은 오직 친정엄마의 공이라 말할 수 있다.
친정엄마는
나에게 엄마인 동시에 남편이 되어주었고,
아이들에게 외할머니인 동시에 아빠가 되어주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아이들은 할머니의 품에서 행복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안하고 좋은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점점 건강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첫째의 피부병은 20 킬로그램이 넘으면서 눈에 띄게 좋아졌고, 둘째도 모든 추적검사를 끝내고, 작지만 당찬 아이로 자라났다.
하지만 한국에서 4시간 반 떨어진 작은 섬에 아이들의 아빠가,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땅에서 오직 가족들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당시에 우리의 모든 대화는
'우리 어떻게 하지..?'로 시작해서, '그래서... 우리 어떻게 하지?'로 끝났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주어졌으니' 경험해보기로 했다. 그런 경험을 쉽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3년 동안 우리가 떨어져 살면서 치러야 했던 많은 그리움과 슬픔에 대해 아무런 보상 없이 이 모든 것을 정리하기엔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게 된 괌.
결정은 부모가 했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왔다. 괌에는 방학 때마다 한 두 달씩 놀러 와 지내 본터라 출발은 즐거운 여행으로 시작했다. 아이들이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엇보다 힘들어했던 것은 할머니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 밥이 먹고 싶어.
할머니에게 특별한 애착이 있었던 둘째는 밤마다 울었다.
할머니 밥이 먹고 싶다며 식사시간에도 울었다. 잘 놀다가도 이따금씩 할머니에게 가고 싶다며 울었다.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어라고 같이 울고 싶었다.)
나도 괌에 사는 것은 처음이라 장 보는 것부터 음식을 해 먹이는 기본적인 일이 쉽지 않았다. 무엇을 해줘도 반찬투정을 하고 할머니 미역국을 내놓으라는 아이 앞에서 (그러면 안되는데) 자꾸 지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멸치 칼국수를 끓였다.
멸치 칼국수
농심 멸치칼국수!
둘째는 냄새를 한 번 맡아보더니, 이내 후루룩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엄마는 최고의 요리사야!"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4살 아이에게 멸치 칼국수는 어떤 맛이었을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솔레다드 요새라는 곳에 갔다.
이곳은 남편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할 때 울적하고 힘들면 드라이브 겸 오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마음이 뻥 뚫리는 경치를 볼 수 있어서 나도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좋은 곳에 갈 때마다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사진을 찍자는 (사진 찍기 무서워했던) 첫째와 할머니랑 같이 오고 싶다는 둘째.
여전히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항상 함께하고 싶은 존재이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그 마음을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저녁으로 멸치 칼국수를 먹었다.
첫째가 말했다.
"이건 인생의 맛이야!"
(당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7살 아이의 입에서 인생이란 단어가 나오다니.. 요즘 애들 참 빠르다.)
"오빠, 그럼 할머니 밥보다, 엄마 밥보다 멸치 칼국수가 더 맛있다는 거야?"
(딸+막내의 눈치코치는 당해낼 수가 없다!)
면 한가닥도 남기지 않고 싹싹 먹은 후 디저트로 붕어싸만코 하나씩 나름 플렉스한 오늘.
별 것 아닌 거에 웃고, 즐거워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서 30대 중반의 나도 이제 겨우 조금씩 조금씩 엄마에게 독립하고 있는 것 같다.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자라고 있다는 느낌을 참 많이 받는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