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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희 Nov 19. 2020

8. 괌의 아침

이끼 좀 끼면 어때?

미국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은 바로 괌이다. 괌의

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 더 빠르다.


괌의 아침은 생각보다 분주하다. 지금은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 중이지만 학교를 등교할 땐 6시 50분-7시쯤 집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매일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 나의 기상 시간은 5시 50분이었다. (5시 30분부터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이미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보다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을 가진 이들이기에 '부지런함'의 척도가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하고, 그 시간에 잠을 잔다고 해서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 움직인다고 해서 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낸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일처리가 많이 느리고 느긋하다고 해서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벽녘부터 길 위를 달리는 차들은 분명 제각각 열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면, 부지런하다는 것과 열심히 산다는 말이 동일선상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괌에 처음 이민을 왔을 땐, 부지런하면서 열심히 살고 싶었다. 밤마다 아이들을 재우고, 집을 청소하고, 다음 날 도시락을 미리 준비해놓고(비록 볶음밥 재료 다져놓는 정도지만),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국을 끓여놓았다. 빨래를 개서 옷장에 넣어 놓고 나서야 맘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터에서 미끄럼틀 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빠빠이를 하고, 장을 보러 갔다. 괌에선 마트 한 곳에서 원하는 것을 다 구매할 수 없다. A마트에서 계란과 유제품을 사고, B마트에서 고기를 사고, C마트에서 한국 야채와 과일을 사고, D마트에서 아이들 간식이나 스낵을 사야 한다. 그래서 이민 초기에 모든 게 어설펐던 나는 매일매일 장을 보기도 했다.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아침에 가족들이 지나 간 자리들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환기를 시키고 청소도 한다. 한국에서 아파트 생활만 했던 나는 개미군단을 발밑에서 만나 기겁한 이후로 과자 부스러기에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매일매일 청소를 몇 번씩 해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면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나는 괌에 오고 나서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등으로 학교에 갔다. "엄마 일등으로 와!"라는 둘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다른 이들보다 정규 픽업 시간보다 30분 일찍 학교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살고 나니 살이 빠졌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서 얻은 보상 같았다. 하지만 살이 빠지면 예뻐져야 하는데 내 얼굴은 점점 푸석해졌고, 흰머리까지 생겼다. 몰아치듯 하루를 살아내는데 나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자꾸 눈물도 났다.

예쁜 바다와 눈부신 하늘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괌에 단짝 친구가 놀러 왔다. 친정 식구들과의 여행이었는데 일정을 하루 더 만들어 나와 꿈같은 하루를 보내고 떠났다. 나의 하루를 함께 체험한(?) 친구가 말했다. 이왕 괌에 사는데 좀 게을러지라고. 그렇게 살면 이곳에 사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그래서 노력했다. 여전히 내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게을러지려고 했다. 여전히 나는 새벽 5시 50분에 일어났지만 부지런히 살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혼자 혹은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바다 앞에 주차하고 수다도 떨고, 바다 산책도 했다. 집에서 뒹굴며 드라마도 보았다. 하루쯤은 세탁을 미루기도 하고, 점심을 사발면으로 때우기도 했다. (생애 처음 시중에 파는 사발면을 종류별로 정복했다.) 책도 읽고 그냥 누워있기도 했다. 아이를 픽업하기 전에 혼자 드라이브도 하고, 가끔은 남편과 점심 데이트도 했다. 집은 조금 더러웠고, 냉장고에 우유와 계란이 없는 날도 있었다.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숨통이 트였다. 더 이상 운전하면서 혼자 울지도 않았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온 이민이다.

돈도, 커리어도,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도, 친구들의 경조사도.


잘 해내고 싶었다. 1분 1초도 허투루 살면 안 될 것 같은 중압감이 있었다. 부지런하면 부지런할수록 자꾸만 내가 포기하고 온 모든 것들이 생각났고, 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로서의 역할이 전부 같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엄마가 아니라 가정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바닥을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고 화장실에 머리카락을 다 치워놓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게을러보니 그렇지 않더라. 내가 지치지 않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그런데 괌 사람들을 보면 구르긴 구르는데 이끼가 많이 껴있다. 괌이라는 섬도 그렇다. 2019년 기준 한 해 16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다녀갔지만 삐까뻔쩍하게 바뀌지 않는다. 섬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구르는데 이끼가 껴있다.

나의 삶도 그렇다. 오늘도 어제처럼 굴러가지만 반들반들 반짝반짝 완벽하진 않다. 그래도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완벽하려고 너무 부지런하게 열심히 애쓸 때보다 더 편하고 좋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번 학기는 쭉 온라인 수업 중이라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올 일이 잘 없었다.)

7시가 되기 전에도 하늘은 이미 아침 기지개를 켜고 하루를 시작한 지 오래다. 친한 언니가 자동차 점검을 해야 하는 날이라 픽업을 해주러 다녀왔는데, 언니가 요즘 핫하다는 크로플과 집에서 내린 커피를 (나의 사랑) 스타벅스 컵에 담아서 건네주었다. 아침 공기가 정말 상쾌했다.


오랜만에 달린 괌의 아침 도로는 여전히 분주했다. 코로나로 많은 직장들이 재택을 하고 있고, 많은 사업장들이 휴업을 하고 있음에도 차가 많았다. 열심히 사는 그들의 하루를 응원하고, 동시에 조금 답답하고 느린 그들의 삶을 존중한다. 게으른 저녁을 위해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미국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 이곳은 괌이다!




(그리고 저는 마음의 편안함과 함께 살이 무척 아주 많이 쪘습니다...)


제일 빨리 등교하고 제일 빨리 하교하는 아이!





뚜레 카페

Ture Cafe

(671) 479-8873

349 Marine Corps Dr, Hagatna

새벽 6시 30분에 오픈하는 카페입니다. 아침 일찍 바다를

보며 게으름 피우기 좋은 곳이에요.



(항상 새벽에 눈을 떠서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시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저도 새벽 세시에 아무도 없는 도로를 운전해서 출근하던 시절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고요. 그땐 열정도 있고, 목표도 있고, 월급도 있었으니까요. 하하! 이 글은 괌이라는 곳에서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저의 삶을 반추해보았을 때 느낀 점을 적은 개인적인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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