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담쟁이 돌려주세요

by 윌버와 샬롯

싹둑 기사 1


일제 시대에 지어졌던 중학교에 다녔었다. 나무로 된 복도는 왁스로 반질반질 윤기 나게 닦아야 했었다. 나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그덕 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그 학교에서 잊지 못할 것은 본관 건물에 온통 덮여 있던 담쟁이덩굴이다. 바람이 불면 물결처럼 넘실대던 담쟁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억 속 중학교 이미지는 그렇게 담쟁이가 거진 차지하고 있을 거다.


기사 사진에서 담을 타기 시작하는 담쟁이가 보인다. 한 장의 엽서 같은 컷이다. 아래로 흐르는 풀은 마치 물 위를 조심스레 걷는 우아한 숲 속 요정이 연상된다.


사진처럼 어디든 담쟁이만 보이면 그 예전 중학교가 생각난다. 졸업하고서 한 번도 그곳을 가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그 담쟁이가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갈 기회가 통 없었다. 지금도 그 담쟁이가 존재할까 싶어 학교 이름을 검색하고 사진을 들여다보니 내 기억 속 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낯설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냥 보통의 학교 건물만 보였다.


오래된 건물이었고 안전에 문제도 있어 새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모교를 방문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오직 담쟁이 때문이었는데, 이젠 그 이유가 없어졌다. 참 마음이 허전해졌다.



싹둑 기사 2

모기가 밉상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인이 전해준 다산 정약용의 시 `증문(憎蚊·얄미운 모기)`을 보니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 "호랑이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코 골며 잠잘 수 있고/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모기 한 마리 웽 하고 귓가에 들려오면/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다/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어이하여 뼈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베이불 덮어 쓰고 이마만 내놓으면/금방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 머리가 되고/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이미 가고 없어/싸워봐야 소용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니…." 혹자는 다산이 모기에 탐관오리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고 해석한다.


모든 구멍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모기는 틀림없이 앵하고 그 존재를 드러낸다. 주말엔 남편과 미심쩍었던 방충망 작은 틈새를 보수했다. 남편은 이제는 모기가 없지 않냐며 기세 등등 말한다. 그러나 비웃기라도 하듯 새벽에 딸은 자기 방에 모기가 있다며 안방으로 쪼르르 와 잤더란다. 모기로 애먹은 건 비단 우리 집만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었나 보다.


재밌게도 요즘 읽고 있는 영미 단편선에도 모기로 밤잠을 설친 피츠제럴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불면증을 이 모기로 인해 생겼다고 토로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더웠다. 그러나 첫 번째 대결 이후, 그러니까 바보처럼 허공을 때리고, 헛되이 모기를 찾다가, 간발의 차이로 내 귀를 후려친 뒤, 나는 오래된 방법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잠과 깸> F. 스콧 피츠제럴드


책에서는 모기와의 치열한 사투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조선의 정약용이나 20세기 미국의 피츠제럴드나 모기를 대하는 태도가 어찌 이리 똑같을 수가 있을지 웃음이 나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에게도 모기는 그들을 꼼짝없이 괴롭혔다.


근데 모기는 왜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줄 당신은 아는가? 서아프리카 옛이야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래 그림책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어쨌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는 모기가 어쩐지 지금은 처량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오늘 밤 당신에게는 앵 소리가 부디 들리지 않기를.




싹둑 기사 3

그런데 만델라가 셰익스피어 전집에 서명을 했던 12월 16일은 사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치욕의 날이었다.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1838년에 줄루족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약속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자 12월 16일을 국경일인 ‘화해의 날’로 정했다. 그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복수가 아니라 화해와 용서로 응답했다.


살아가기가 점점 팍팍해져서 그런 걸까.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는 왜 자꾸만 훼손되고 있는 걸까. 인종, 젠더, 빈부 등 차별이라는 차별은 모두 쏟아지는 시대인 것만 같다.


글을 모르면 깨쳐서라도 밤이 되면 서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돌려보는 죄수의 모습이 참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만델라는 화해와 용서로 응답했다. 코로나로 단절의 시대를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 더욱 우리는 만델라의 응답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싹둑 기사 4

“코로나 19 종식은 불가능한 목표다.” 21일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오명돈 위원장의 기자회견 발언은 섬뜩할 정도로 명쾌했다. 그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돼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는 이상… 방역 목표는 코로나 종식이 아닌 인명 피해의 최소화”라고 잘라 말했다.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코로나와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벌써 7월이다. 이번 달 말이면 아이들 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이한다. 2월에 발표한 2주 정도의 개학 연기는 지금의 형국까지 왔다. 이렇게 한 학기가 지나가나 보다. 그렇다면 2학기는 정상적으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교육계 있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올해는 틀렸고 앞으로 1-2년도 안심할 수 없지 않나 하는 비관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래, 이제는 인정하자. 코로나19 종식은 불가능하다. 바이러스 변종으로 인해 백신 개발마저도 적신호라는 내용은 더 암담한 미래가 예견된다.


빌 게이츠는 최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극복의 힘을 인류의 ‘혁신 능력’에서 찾자고 했다. 다만 전염병이 몰고 온 ‘단절’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국경이 닫히고 교류가 줄며 사람 간 만남과 접촉이 회피되는 세상에서, 인류는 또 어떤 ‘즐거운 일’을 찾아낼까.


아이는 오늘 학교에 갔었다. 오프라인 등교 이후 처음으로 강당에서 무용 수업을 했다고 했다.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그래도 오랜만의 강당 수업이 나름 즐거웠나 보다. 이전까지 온라인으로 체육 수업을 들었었다. 파트너가 필요한 체조를 할 때는 엄마까지 대동해서 수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내 지루해했다.


인류는 분명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빌 게이츠는 인간의 혁신 능력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처음 겪는 이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지혜를 결국에 안겨주게 될까. 아이가 친구들과 손에 손 잡고 둥굴레 둥굴레라도 하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제발 2학기라도...

신문이 내준 뉴 노멀에 관한 문제다. 심심풀이로 풀어보자.

Q. 코로나19 이후 발생한 ‘㉡뉴 노멀’의 사례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여러 사람과 찌개를 먹을 때 아버지가 앞접시에 각자 덜어먹자고 제안했다.
② 나는 열이 38도까지 오르자 해열제를 먹었다.
③ 어머니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의사와 영상통화를 하며 건강을 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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