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박 수영장
수박 수영장. 표지에는 반으로 쪼갠 수박 안에서 두 팔을 턱하고 걸치고 있는 아이 모습이 보인다. 시원해 보인다?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했을 시원함,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와사삭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 시린 수박을, 미안하지만 난 느낄 수 없었다. 첫 느낌은 ‘아, 끈적거려’였다.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닌데 하면서. 동심이라곤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래도 그림책 속 아이들이 수박 수영장 속으로 퐁당 빠지는 그림을 보노라면 우리 아이들의 그만한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저학년 때 일 년 정도 수영을 배웠다. 끝내주게 잘하는 수영 실력은 아니지만 무서워하지 않고 어디에서도 물놀이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거면 족했다. 아이들한테 가르친 것 중에 만족도가 높았던 나름의 사교육 중 하나다. 물놀이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지 나는 물이 무섭다. 어릴 적 소독약 냄새 물씬 나는 수영장에서 코로 입으로 그 물을 흠씬 마시고 허우적거리던 공포의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다에 몸을 담근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자유롭게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아이들은 나의 대리만족이 되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이 오기 직전에 갔었던 여행이 떠오른다. 노을이 예뻤던 어느 해변에서 아이들은 여지없이 미역을 서로 경쟁하듯 주워 날랐다. 우리는 어느 장소보다 바닷가에서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핫플레이스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원한다면 그곳을 충분히 만끽하게 했다. 나는 모래사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짐을 지켰고 남편과 아이들은 바다를 즐겼다. 발이 닿는 곳까지의 몸 담금이 내가 바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치다. 거침없는 아이들의 물에 대한 해방감은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마도 아이들이 바다에서 제대로 논 게 그때가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다. 이후 팬데믹이 왔고 여행은 언감생심인 일이 되었으며 그사이 아이들에게는 사춘기가 왔으니 더 이상 바닷가로 들어가지 않았다. 몸에 바닷물을 적시는 게 이제는 귀찮은 일이 되었고 그저 엄마처럼 발만 담그거나 돗자리에 누워 망중한 낮잠을 자는 게 전부가 되었다. 이제 여행 중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일정은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이번 여름 휴가는 어땠을까. 하루 일정 중 하나로 가벼운 등산을 넣었다. 등산길이 그리 힘들지 않고 가는 산행에서 아기자기한 여러 폭포도 볼 수 있다니 경치가 좋을 것 같아 정한 코스였다.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장 예쁠 것 같은 장소까지 목표로 하고 산에 올랐다. 우리는 등산에 최적화된 복장은 아니었지만 힘든 산은 아니었기에 괜찮지 싶었다.
그러나 폭풍이 지난 직후여서 산길은 꽤 질퍽했다. 농구화를 신고 산을 오르던 아들은 목적지를 1km 남기고 하산하자고 했다. 신발이 너무 미끄러워 힘들다고. 도착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처음 목표했던 예쁜 폭포를 못 보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안전도 중요하기에 아들 말을 따랐다. 대신 올라가면서 봤던 계곡에 자리를 잡고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잘 보이지 않는 아늑하고 편안한 자리를 남편이 딱 찾아냈고 우리는 각자 알맞은 바위에 앉아 더위를 피했다.
엄마, 여기 닥터피쉬가 엄청 많이 있는데?
아이 둘은 계곡 어느 지점 작은 물고기 무리를 발견했다. 이후 아이들과 남편은 발에 모이는 그것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물고기들에게 발을 맡기고 떠날 줄을 몰랐다. 난 나무 그늘이 있는 널따란 바위를 찾아내 그 위에 누웠다. 경쾌하게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리고 바람마저 살랑거리는 그곳에서 잠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작은 태블릿 PC를 꺼내 거기에 담겨있는 책을 읽었다. 생생한 계곡 ASMR을 들으며 한 조각 에세이 읽기라니, 이게 바로 진정한 휴가로구나 싶었다.
닥터피쉬에 싫증이 났는지 어느새 아들과 남편은 물수제비 내기를 하고 있었다.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는 아빠와 제법 근접하게 큰 아들이 물수제비를 꽤 뜨고 있었다. 서로 웃으며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아빠와 아들, 물고기에 여전히 발을 내어놓고 하염없이 계곡물을 바라보는 딸아이, 바위에 누워 책을 보는 엄마. 어떤 걱정과 고민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곁에 없었다. 어릴 때처럼 아이들은 수영을 하지는 않았지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플라잉 낚시로 절경의 포스터 장면을 완성한 배우 브래드 피트 못지않은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장면이 내 머릿속에 찰칵 찍힌 순간이다. 훗날의 어느 날 아이들이 그리울 때 이날의 순간을 나는 아련하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도 한 장면 해내었구나. 계획에 없던 계곡에서의 우연한 우리들의 몇 시간.
여행은 왜 가는 것인가. 나는 지워지질 않을 기억을 저장하고 싶어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상에서의 쉼표 같은 떠남은 삶의 스타카토 같은 역할을 해준다. 시간 앞에 어쩔 수 없는 망각에서 조금은 기억을 붙들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분명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 힘들고 지칠 때 가족이 함께했던 장면들이 떠오르기를. 아빠와 놀던 바다 수영, 수영은 못하지만 짐을 지키며 멀리서 가족들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던 엄마, 내비게이션이 안 되는 곳에서 길을 잃어 헤매던 때 칠흑까지 어둡던 그곳에서 봤던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 맨발로 걸어 다녔던 어느 황금 사원, 엄마 손은 까칠한 누나에게 뺏기고 여행 내내 서먹한 외삼촌의 손을 잡고 다녔던 외로웠던 어떤 날들, 아이들 스스로 처음 일정을 짜서 갔던 가족 여행, 고소공포증으로 출렁다리를 건너지 못하던 엄마, 내 발을 간질이던 물고기들, 아빠보다 멀리 날아갔던 내 조약돌. 그 모든 장면들이 아이들에게 불현듯 떠올랐으면 좋겠다. 잠시 잠깐이라도 그 순간에는 외로울 어느 시기에 그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림책 <수박 수영장>은 색연필 톤이 친근하고 편안해서 좋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눈사람 울라프에게 녹지 말라고 엘사가 만들어준 눈구름처럼 수박 수영장에서는 뜨거운 햇볕을 가려줄 구름 양산과 먹구름 샤워가 있다.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배려와 재치가 있는 장치다. 엄마가 부를 때까지 수박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이 해가 지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면은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던 바닷가를 우리 아이들이 잔잔히 걷던 뒷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인상적이었다. 물만 보면 와다다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던 아이들의 유년 시절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그림책을 보니 머릿속에 콕 찍혔던 장면들이 이렇게 아련한 필름처럼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밤이 되면 매미가 아니라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이제 서서히 과거가 될 이 여름을 시원한 수박을 와사삭 한 입 베어 물며 추억해본다. 안녕, 여름아!
당신의 올해 여름은 어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