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 좋아하세요?
여름을 감지하는 G에게 [가을에게, 봄에게]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을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손원평 소설 '아몬드'의 주인공은 격변의 봄을 이렇게 치켜세웠다. 그러나 어느 계절을 좋아하는지 누가 내게 묻는다면 쉬이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그 계절이 갖는 뚜렷함이 있지 않은가. 그 각각의 개별성에 우열을 가릴 수 없기에 어느 한 계절을 꼽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절 변화에 대해 특별하게 다가 온 말이 하나 있다. 대학 동기인 G가 말했다.
난 여름이 오는 바람 냄새를
알아챌 수 있어.
아마도 그날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20대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여름이 오고 있는 냄새라, 그건 도대체 무슨 얘기지? 꽃이 피거나 이파리가 돋거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 혹은 햇살이 피부에 느껴지는 온도 차가 아닌 냄새라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후각을 통한 계절감의 말이 내겐 낯설었다.
한참이나 지난 친구와의 짧은 대화였을 뿐인데 여전히 그 말이 난 또렷하다. 그날 잔상이 선명한 걸 보면 친구 말이 생소하긴 했지만 내겐 그 말이 멋지고 싱그럽게 들렸었나 보다. 그래서 그럴까. 난 여름만 다가오면 G처럼 그 여름 냄새를 알아채고 싶어 살며시 숨을 깊게 들여 마실 때도 있다.
서로 이웃하지 못한 계절을 통해 자신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한 이 그림책의 시선이 참 신선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이렇게 순차적으로 계절은 당연히 돌아오는데 한 번도 봄과 가을이 혹은 여름과 겨울이 만나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봄은 깨어나 겨울을 보내고, 다가오는 여름에게 인사하고 다시 잠이 든다. 그 사이에 만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계절이 있다는 걸 봄은 미처 몰랐었다.
살금살금 일어난 나는 겨울에게 찾아가 인사를 건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러 점점 해가 길어질 무렵, 여름이 찾아옵니다. 가을? 그러고 보니 나는 가을을 만난 적이 없네.
겨울은 가을을 따뜻한 아이라 하고, 여름은 가을을 차가운 녀석이라고 봄에게 말한다. 가을에 대한 너무나 다른 소개에 봄은 직접 가을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봄은 봄에 볼 수 있는 모습에 대해 가을에게 얘기해 준다. 피어나는 꽃, 새로 태어난 생명, 열매 맺는 과일, 푸르른 하늘에 관해 편지로 전한다. 여름에게 받은 봄의 편지는 가을에게 전해지고 가을도 봄에게 가을만의 모습을 편지에 담는다.
언젠가 만날 수 있길 바라며.
편지를 쓸 때마다 봄과 가을은 언젠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인사를 썼다. 그 말이 참 슬펐다. 봄과 가을은 만날 수 없는 운명이지 않은가. 마치 서로 너무나 잘 맞는 영혼의 단짝임에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헤어질 수밖에 없던 윌리엄 스타이그의 '아모스와 보리스'처럼. 그걸 알기에 봄과 가을도 서로를 더욱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나랑 편지하는 게
재미없을지도 몰라.
편지만으로는 전하지 못한 진심이 숨겨지게 되고 예기치 않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다행히도 봄은 겨울에게서 가을의 속내를 듣는다. 가을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만날 수는 없지만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항상 그 자리에서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직 몰랐니?
너희 꼭 닮았는 걸.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고,
한결같이 상냥한 계절.
한결같이 상냥한 계절이라, 이보다 봄과 가을에 딱 맞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봄과 가을만 되면 마음이 말랑해지는 게 그 계절의 상냥함 때문이었던 거다.
연둣빛깔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되면 축 쳐져있다가도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매미 소리가 들리면 이제 여름이 오는구나 생각하고 차가운 계곡물에 담글 수 있는 맨발의 가벼움을 기대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이제 가을이구나 하며 알록달록 낙엽이 발에 차이는 사각거림을 기다린다. 첫눈이 내리면 그저 물색없이 설레게 되는 겨울인 온 것이다. 난 정말이지 사계절 모두가 좋다.
저마다 그렇게 계절을 맞이하는 방식이 있다. 가을이 왔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보고 감탄하고 사진을 찍는 계절. 선선해진 밤에 이불을 폭 감싸는 느낌이 꽤 괜찮다. 혹독한 여름을 견뎌냈기에 맞을 수 있는 행복이리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가을은 노래에서마저 편지를 쓰게 한다. 봄과 가을이 마음 따뜻한 편지를 서로 나눴듯 나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름의 말을 남긴 G에게 그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보고 싶어, 친구야!
이미지 출처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