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다는 것
“엄마, 지난번에 본 드라마가 끝이라고 안 했어요? 근데 또 보는 거예요?” 그래, 아들아. 어쩌지, 엄마 또 늪으로 빠져버렸어. 시작을 말았어야 하는데, 그치? 절대 안 볼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놓고선 아이한테 매번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로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이야기를 접했을 땐 이성적 판단은 저 멀리 달아나고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다들 본다기에, 요즘 화제작이니까, 실은 그 시간에 딱히 볼 것이 없기도 해서 보게 된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도 딱 발견하고 말았다. 여주인공은 병의 악화로 극 중 악역 캐릭터를 남편으로 착각해 따라가게 되는데 그 장면을 배우 김수현이 1인 2역으로 소화했다. 자동차 창문으로 살며시 비친 빌런의 옆모습을 그때서야 보게 된 여주인공,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다시 확인하는데 역시나 남편이 아니다. 캬아, 제법인데. 그 장면을 어떤 정보도 없이 본방송으로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이미 기사로 읽었었고 재방송으로 봐서 감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영화 ‘식스 센스’급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연출이다.
또 하나, 재벌가가 망해서 시골 사위집으로 우르르 신세 지러 왔는데 그중 세상물정 모르는 재벌 처남은 서민 매형에게 수건 하나를 건네받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만다. 문제의 그 수건은 매형 조카의 돌잔치 답례품이었는데 이미 어엿한 어린이가 된 조카, 자그마치 연식이 8년이나 된 수건을 써야 하는 현실에 처남은 망연자실한 것이다. 허, 이 디테일 좀 보소. 우리나라 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장면 아니겠는가. 우리집 욕실 수건걸이에도 버젓이 있는, 얼굴도 모르는 어느 누군가의 칠순 기념 수건이 퍼뜩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중반부터 본 이 드라마에 사족 하나 보태자면 남자주인공이 수도꼭지처럼 자주 우는 건 좀 별로다. 드라마 제목을 ‘눈물의 왕자’로 할 걸 그랬다. 과유불급. 눈물은 좀 아끼자. 근데 배우의 절절한 그 눈물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대박 포인트가 아닐까도 싶네.
요즘 읽고 있는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작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세일즈맨 윌의 큰아들 비프에게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두 번의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첫 번째는 학교 졸업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그 해결을 위해 출장 간 아버지 윌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두 번째는 재기를 위해 사업 밑천 투자 건으로 사무실에서 사장을 기다리는 시간인데 양립된 이 두 번의 기다림은 비프 인생에 있어 무척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첫 기다림은 우상과도 같던 아버지에게 실망하여 앞으로의 삶에마저 의욕을 잃게 하는 계기가 되고 두 번째 기다림은 외면해 왔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미 이 작품에 매료됐었지만 작가의 이런 치밀한 설정은 세 번 정도 읽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오, 이거 괜찮은데. 작가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서 밀러 만세! (아, 맞다.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기도 했다. 실은 그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작자를 미워하기로 했었는데 이 사람 천재이긴 하네, 쩝.)
“좀 조용히 보면 안 될까?” 할 말이 떠오르면 쉴 틈 없이 쏟아내는 내게 남편은 참다못해 말한다. 그냥 보면 안 되냐고. “아니, 저거는 좀 아니지 않아? 나 같으면 안 그럴 거 같은데…….” 소개팅 첫만남에서부터 조잘조잘 말을 참 잘하던 내게 반한 거 아니었나? 이젠 아니다 이거지? 흥칫뿡이다!
듣는 이의 귀에 피가 나도록 말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그렇다. 난 불평불만도 많고 세상에 할 말도 많은 숨은 투머치토커다. 종종 혼잣말도 한다.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이 주체 못 할 수다를 풀 곳으로 말이다. 순간을 붙잡고 싶으면 글을 쓴다. 지금의 생각을 남기고 싶으면 글을 쓴다. 답이 없어도 그냥 쓴다. 쓰다 보면 후련하다. 어느새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지라도 쓰고 본다. 계속 쓰다 보면 뭐가 되긴 할까? 뭐가 되고 싶기도 하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쓴다. 아마도 안 됐다고, 그래서 속상하다고 눈물 찍 흘리며 투덜투덜 쓸 것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을지라도 쓴다는 건 세상에 대한 나의 작은 외침이다. “엄마, SNS에 누가 그렇게 길게 글을 써?” 그래, 인정해. 근데 엄마는 만연체야. 막지 마라, 딸아. 네 귀에다 말하지 않는 게 어디니, 그치?
다시 캔버스 앞에 선다.
큰 여백이 눈과 손의 새로운 기억을 기다린다.
작가 이세 히데코는 물을 가득 먹은 아름다운 수채화로 달과 저녁노을의 빨강을 훔치고 얻는 여행길을 나섰다 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훌륭히 표현해 내는 화가가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글로써나마 그녀와 비슷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여행-인생-의 목적을 이윽고 알았다.
“거친 사생이 밑그림이 되고, 이윽고 완성된 그림이 되기를.”
- 빈센트 반 고흐
노트북을 켠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드라마 어디가 좋았지? 이 칼럼 글 완전 공감되는데. 저 달은 어찌 저렇게 완벽한 원일 수 있을까? 그 작은 틈에서 그새 민들레가 피었네... 이렇게 나는 세상에 대고 주절주절 계속 묻고 떠들 것이다. 고흐 말에 빗대, 이윽고 완성된 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노트북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