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 씨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꽃이 되었다는 어느 유명한 시구처럼 정말 그렇게 책 속에서 꽃이 된 여성들을 보게 된다. 트렌드 일까. 90년대에 태어난 몇몇 여성 작가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가까운 여성들에게 누구 씨로 명한다. 엄마나 할머니가 아닌 미경이나 복희 씨로. 본연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캐릭터가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엄마나 할머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한 여자로서의 삶이 그들의 딸이거나 손녀가 쓴 애정 어린 글에서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서로가 아는 그를 말로써 함께 추억하는 건 아직 힘들다고 글을 쓴 이는 말했다. 그립고 아름다운 글을 들으며 그립고 아름다운 사람이 그려졌다. 난 생각했다. 떠난 자의 기억들을 같이 꺼내어 추억한다는 건 아직까지 우리에겐 어려운 일일까.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걸까. 이별이라는 건 생각만으로도 하물며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고 어느새 눈물이 주르르 흐르겠지만 함께했던 시간들을 이름을 불러 얘기한다면 그를 더 우리 옆에 두어두는 건 아닐까. 서로 나눠야 그 기억들은 더 오래 또 머물지 않을까. 순례 씨와 그의 이곳저곳 공간과 말을 기록해 낸 작가 손녀의 따스한 그림과 글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쫓는 시간을 한동안 보냈다. 애달팠던 마음은 어느새 은자 씨에 대한 원망으로 흘렀다. 그는 그러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문도 모르고 남겨질 철없는 아이를 더 곁에 두었어야 했다. 나를 생각했을까. 내게 미안했을까. 어떤 것이라도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다. 손이라도 잡아줬어야 했다. 그것들이 사는 내내 아이에게는 유일한 유산이 될 수도 있음을 몰랐을까. 그는 평생의 질문을 내게 남겼다. 은자 씨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은자 씨는 언제 행복했을까.
살아서 좋다던 것들도
가고 나면 다 먼지.
난 그를 끝내 모르겠지만 먼지 같은 기억일지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립거나 미워하거나 하며 문득문득 그를 생각할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애니메이션 ‘코코’에서처럼 어떻게든 붙잡고 있을 것이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과일 올리는 그런 상차림 앞 의식이 아니더라도 내 작은 기억만으로도 조금은 그와 가닿고 싶어서. 은자 씨. 이렇게 내가 불러주어 그도 어여쁜 꽃이 되었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