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마중
그림책 속 아이처럼 나는 엄마를 이렇게나 기다려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반대로 엄마가 되고 나서 아니 엄마가 되기 위해서부터 나의 기다림은 시작된 것 같다. 엄마 마중이 아니라 아이 마중. 엄마라는 직업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런 걸 알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이미 성장한 자녀를 두고도 “자식에 대한 기다림은 내가 죽을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라며 ‘너흰 그걸 모르지? 아직도 멀었어’ 혼자만 아는 엄청난 비밀 하나를 알려주듯 선배 엄마는 어느 날 초연히 말했었다. 아, 엄마라는 건 그토록 고된 거로구나.
세 돌 지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오랜만에 생겨난 혼자만의 시간인데도 걱정만 하다가 시간이 되어 얼른 달려가 아이들을 데려왔다. 누가 채갈까, 바람에 날아갈까, 양쪽으로 아이들 손을 꼭 잡고 다녔었다. 내 모든 사랑을 내 방식대로 주었지만 때때로 서툴렀고 잠든 아이들을 보며 미숙한 엄마 노릇에 미안해하며 울기도 했다.
“난 참 엄마 역할을 잘하는 것 같아.”
친정 엄마도 인정했다며 스스럼없이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말하던 동네 엄마의 스쳐가는 말이 내겐 참 인상 깊었다. 어쩜 저렇게 자신 있을까. 난 매번 전전긍긍인데. 나도 그처럼 자신만만한 엄마가 언젠가는 될 수나 있을까.
예술을 한다는 건 원래 고단한 일이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이니 마저 기다림을 감내해야 한다. 지름길은 없고, 정직하게 규칙을 지켜야 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서 언더스터디 배우 에스터는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서 예술 대신 부모라는 단어로 바꿔 넣어도 그럴듯할 것 같다. 부모는 원래 고단한 일이며 기다림을 감내해야 한다고. 연극을 보고 어쨌거나 삶은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의미? 살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기다리는 게 우리 일이야. 다른 생각하지 마. 그게 최선이야.” 에스터의 말처럼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삶을 이어가며 찾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무엇일지 모른 채로 살 수도 있다는 것까지 인정하는 것. 그건 아이를 키우는 것에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진리를 찾기 위해 결론을 내기 위해 종종거리던 내게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연극에선 내내 기다리다 끝내 보고 싶은 사람을 마주하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만 나오지만 그의 영원한 부재의 알림에서 난 울컥해 버렸다. 기다리는 게 무언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날 수도 있다는 어떤 허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여전히 뭔가를 기어이 찾고 싶은 거다. 다행히 그림책 <엄마 마중>에서는 기다리다 보면 다정한 차장을 만나기도 할 것이고 첫눈처럼 포근한 응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준다. 그건 아주 자세히 살펴봐야 찾을 수 있다. 마침내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뒷모습을 발견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무엇이든 누구든 결국엔 대답하는 기다림이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난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