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뭐라고 생각해?
귀엽고 아늑한 Eustress.
어느 추운 주말.
들어가는 카페마다 꽉꽉 차서 여러 번 반복해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작년 겨울에도 30분을 배회하다 결국은 우리 작은 몸을 앉힐 곳을 찾지 못하고 차로 돌아간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지도 어플을 켜고 현재 위치 기준으로 당장 근처의 카페들을 띄웠다. 서 있던 곳으로부터 요리조리 꺾어 들어가야 했던 골목에 '유스트레스'라는 이름의 카페가 보였다. 스펠링이 you stress 일까 생각했다. 이 무슨 당돌한 상호인가.
"이름이 이게 뭐야. 너 스트레스받는대.ㅋㅋ"
웃으며 친구에게 말했다.
그곳을 제외한 근방의 다른 카페들은 모두 자리가 없는 걸 직접 확인했기에 이 재밌는 이름의 카페를 갈 수밖에 없었지만, 또 가보고도 싶었다.
"여기 어디라는데... 아 여깄다!"
카페가 작아서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출입문은 더 작은 카페였다. 아마 지도가 없었다면, 그냥 '카페인지 아이스크림 가게인지 매장 같은 게 하나 있네.' 하며 무심하게 지나가기 딱 좋았다.
그때 한 커플이 나왔다. 자리가 있다는 게 방금 증명된 셈이었다. 누가 먼저 들어갈까 봐 채 2미터도 안 남은 카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리문에 붙은 코팅된 종이에 매장이 만석이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직원분 한 분이 나왔다. 방금 난 자리를 치우고 들어오겠냐 물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곧바로 들어간 카페는 정말 아담하고 아기자기했다. 이 정도로 귀엽고 개성 있는 동네 카페가 이제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벽은 위아래 반으로 나눠 흰색과 진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화장실 문은 철문이었는데 그 문도 진한 주황이었다. 여기에 오렌지빛 조명까지 더해져 전체적으로 귀엽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카페가 작아서 그런지 손님들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소음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 앉았다.
2인 테이블이 넓지 않은 간격으로 7개 있었다. 내가 앉게 된 자리는 통로였는데, 매장이 작아서 사실 통로랄 것도 없었다. 이렇게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는 오랜만이었다.
들어갈 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했는데 디저트 메뉴가 꽤 화려했다. 메뉴를 소개하는 포스터도 꽤나 직관적이었다. 볼드한 글자에 색감들이 뚜렷해 눈길이 갔다. 진한 주황색으로 가게를 꾸민 사장님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크림 브륄레, 캐러멜푸딩… 아인슈패너도 밤 아인슈패너. 메뉴에 공을 들이는 곳 같았다. 이런 곳이라면 왠지 믿음이 갔다. 매번 다른 카페를 다니는 일은 어떤 매력과 선물을 마주칠지 모르는 럭키드로우 같은 것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에 크림브륄레, 캐러멜푸딩이 작은 쟁반에 나왔다. 스푼까지 알록달록 컨셉에 충실했다. 친구와 나는 각자 주문한 디저트를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친구의 캐러멜푸딩이 탱그러웠다. 달콤한 캐러멜 시럽이 묻어 찰지게 흔들리는 푸딩을 한 입 떠먹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다. 초딩 때 먹던 거 같아."
"난 더 진할 줄 알았는데 아쉽네." 친구의 기대는 구체적이었는지 아쉬운 눈치였다.
나는 크림브륄레를 시켰는데 크림브륄레는 표면의 설탕 코팅을 톡톡 쳐 부시는 재미가 있다. 작은 유리조각처럼 깨진 설탕 조각의 달달함이 정신을 깨워주는 듯했다. 실내도 따뜻하고, 커피도 따뜻하고, 디저트는 달고... 추운 날씨에 움츠리느라 긴장한 모습으로 꽁꽁 얼었던 몸이 녹고 있었다.
"이거 맛있다. 먹어봐. 리틀포레스트 봤어?"
권유하기가 무섭게 내가 크림브륄레를 처음 알게 된 영화 리틀포레스트에 대해 물었다. 그 좋은(?) 영화를 알고 있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자연과 건강한 요리들을 아름답게 담은 그 영화는, 영상도 내용도 순수한 힐링 그 자체다. 김태리 배우가 연기하는 주인공인 '혜원'은 친구 '은숙'에게 사과의 의미로 크림브륄레를 건넨다. 어린 시절 엄마가 속상한 '혜원'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주던 디저트였기 때문이다. '은숙'에게 건네는 크림브륄레에도 위로가 담겨 있었다.
사과를 하며 상대의 마음을 위로하는 마음까지 가진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내 마음보다 상대의 마음이 더 중요할 만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 역시 화나고 기분 나쁘고 때로는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상대의 마음이 걱정될 만큼, 그러니까 적어도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만큼 중요할 정도로’ 사랑해야 가능한 일 같았다. 굉장한 사랑이 필요한 일이라 줄곧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시비를 떠나 내 마음을 신경 써주는 사람을 사랑이라고 느껴왔던 것 같다. 사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있다기보다는 의견이나 입장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상대의 마음에 대한 위로는 고사하고 사과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명확한 내 잘못이 아니라 오해나 의견대립과 같은 이유로 갈등을 겪게 됐을 경우가 그렇다. 누구든 사과를 좋아하진 않겠지만, 내게 사과란 마음에 대한 위로나 관계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하기보다는 나의 틀림/경솔함 등을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좋아할 리가 없다.
물론 나에게도 때때로 '네게 준 상처가 미안하다'는 의미의 사과가 존재하지만, 사과 자체로 상대의 마음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라 특별히 더 '당신의 마음을 신경 씁니다. 괜찮길 바라요.'라는 위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건 각자의 몫으로 두는 것 같다. 쓰고 보니 꽤 삭막한 인간 같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사과는 잘하는 편이다.
어쨌든 이렇게 개인적인 성향이 있는 내게, 내 마음까지 보듬어주려는 이라니. 어떤 관계로 만난 사람이건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친구에게 사과의 의미를 물었다. 친구는 반성 후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정말 미안해.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이거지."
친구는 나와 갈등이 있을 때 내 기분을 신경 써주는 친구였다. 내 마음을 케어해 주는 친구.
"근데 나는 너같이 따뜻한 애가 내 친구라서 좋아. 날 녹여주거든. 난 너 같은 사람이 주변에 필요해."
그간 괴롭힘을 꽤나 받았는지, 친구는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친구를 더 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