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을 읽으면 나무들이 떠오른다. 커다란 나무, 습기를 머금은 나무, 숲길을 걸으며 만났던 나무, 쭉쭉 뻗은 나무, 창덕궁의 오래된 나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걸어 다니는 오래된 나무정령들. 그동안 만난 나무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올해의 신간 <랩 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트위터에서 본 번역가 김명남님의 추천 때문이었다. 그리고 포스터. <랩 걸>의 표지를 펼치면 식물세밀화 포스터가 된다. 겨우살이가 그려진 포스터를 꼭 내 방 하얀 벽면에 붙이고 싶다는 욕망은 책을 구매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결국, 책은 아빠가 가져가 버렸지만.
아빠와 나는 취향이 종종 비슷해서 같은 걸 두고 서로 가지겠다고 다투곤 한다. 아빠는 책과 표지(이자 포스터)를 가방 안에 넣고서 내게는 한 권을 더 사면 되는거 아니냐고 맞받아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또 아빠와 작은 말다툼을 했다. 아빠가 사는 지리산 자락의 집에 있는 커다란 목련나무 때문이었다.
목련나무는 축대 위에 심어져있는데 나무가 자라면서 축대의 돌들이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며가며 아빠에게 목련나무를 잘라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축대가 무너진다고 경고의 말을 건넸고 겁이 난 아빠는 목련나무의 가지 절반을 베어냈다. 나는 다니구치 지로의 <느티나무의 선물>에 나온 나무 이야기를 일일이 읊어가며 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반대했지만, 아빠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는 쪽이었다.
<랩 걸>에서 나무의 뿌리가 땅속 25-30킬로미터까지 뻗어나간다는 부분을 읽고 나는 그 목련나무의 뿌리가 그만큼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축대의 높이는 50미터도 되지 않는다. 목련나무는 돌들 깊숙이 뿌리를 내리어 축대를 더 견고히 붙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련나무를 믿고 싶다. <랩 걸>을 통해 목련나무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졌다. 나무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지의 반이 잘려나간 목련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
<랩 걸>, 이 책은 나무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호프 자런 같은 (멋진 과학자 X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든든하고 멋진 언니가 생긴 것 같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이란 노랫말처럼 다시 읽고 싶고, 두고두고 함께 하고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