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공감인 하효열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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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에서 김훈 작가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 그 의미를 확실히 모르겠다는 이유였다. 공감인의 하효열 대표는 10년 넘게 ‘치유’라는 키워드를 업으로 삼고 있다. 여전히 감히 치유라는 단어를 논하기에 조심스럽다는 그를 만났다.
지금 하시는 일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간단히 말하면 치유 릴레이죠. 상처 받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받은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거예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아요. 아무리 아닌 척하려 해도 본인은 알아요.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잘 안 들여다보죠. 어느 순간 들여다보면, ‘아 내가 그때 상처 받았구나’ 그게 내 삶에 영향을 줬던 사건이었구나 알고 나면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들이 이해가 돼요. 그 이해 후에는 나만 그런 건 아니겠구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 치유가 되겠구나 생각을 하게 되죠.
보통 치유를 경험하면, 나눠주고 싶어 하나요?
대부분 그런 편이에요. 그런 자리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싶어 해. 가끔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듯이. 치유 릴레이 장소에 오면 편해져. 기운도 차리고. 다른 모습도 발견하고. 일상이 늘 힘들고 실망스러운데, 환기하는 기분. 환기라는 단어도 괜찮네요. (웃음)
치유 릴레이 프로그램을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20명이 한 팀, 4명씩 5개 조로 보통 진행해요. 주 1회 3시간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총 6주짜리 프로그램이에요. 각 주마다 내 인생에서 기억나는 일 3가지, 내 인생의 가장 추웠던 날, 인상 깊었던 음식, 상처 받았던 말 등 정해진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요.
대표님 인생에 기억나는 3가지는 뭘까요?
난 너무 많은데…(웃음) 물리학에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 아내를 만난 것, 노조활동을 한 것 정도네요.
전공은 어쩌다 바꾸셨어요?
원래 물리학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대학 들어갔더니 대인관계가 잘 안 되더라고요.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 했어요. 그러다 보니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성적불량으로 잘렸죠, 뭐. 늘 어딘가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왜 이럴까 고민하다 문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학교를 다시 시험 봐서 들어간 거죠.
두 번째는 나았나요?
나이가 있으니까 조금은 나았지만 거의 비슷했어요. 동기들이 조금 챙겨주는 정도였죠. 그러다 아내를 만나면서 많이 나아졌어요. 아내는 제 얘기를 참 잘 들어줬어요. 나한테는 멘토 같은 사람이죠.
아내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26살에 만났으니까 이제 만난 지 31년 됐네요. 같은 과였어요.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둘 다 게으름 부리다 수강신청을 추가 신청 기간에 해서 출석부 제일 끝에 이름이 나란히 올라갔죠. 그래서 같은 토론 조가 되었어요. 그때 눈이 맞았죠. 서로 아직도 이유를 찾고 있어요. 우린 서로 왜 끌렸을까. (웃음)
지금도 아내분이 멘토신가요?
서로 관심 가지는 영역이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달라요. 서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비슷한 것도 다른 것도 참 많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자주 이야기해요. 반은 진담, 반은 농담이지만요.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이렇게 엮일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리고 있어요. 서로 이만하면 잘 살았다,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다 격려하면서요.
첫 직업을 조종사로 시작하셨어요. 특별히 이유가 있나요?
지금 청년들 듣기에는 이상할 수 있는데, 그땐 여러 회사에 동시에 취직이 됐어요. 세 군데가 동시에 됐는데, 저는 페이퍼워크를 안 좋아해요. 사무실에 있다는 것은 결국 사내 정치를 해야 하기도 하니까요. 저는 돌아다니는 게 좋았고, 조종사는 적어도 페이퍼 워크는 많이 안 할 것 같았어요. 잘 맞을 것 같았죠.
조종사로서의 일상이 궁금해요.
첫 2년은 수습기간이라 비행 훈련을 받아요. 제주에 제동 목장에 있는 비행장에서 1년,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훈련받고 부기장 자격증을 취득해요. 정식 입사는 93년에 했고. 해고될 때까지 부기장 생활을 했죠.
일상은 간단해요. 스케줄 나오면 시간 맞춰 가고. 기장 부기장 만나서 비행 계획 나누고, 비행기로 가서 객실 승무원들과 비행계획 공유하죠. 그렇게 비행하고 나면 퇴근하는 거죠.
위계질서가 강하게 있었을 것 같아요.
아주 심했죠. 조종사들 중에 군 출신이 많았어요. 훈련소도 군대처럼 강압적이었는데,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교관들이 다 군대 교관 느낌이었죠. 우리는 다 사회인인데 왜 이렇게 대하나 싶었어요. 한 번은 축구하다 다쳐서 의료담당자와 함께 병원을 다녀왔는데 무단이탈이라고 하더라고요. 보고도 다 하고 갔는데. 나중에 보니 축구하다가 조심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던 거죠. 경위서를 50장 쓰라고 하더라고요. 이건 동기들이 나눠서 5장씩 쓰긴 했는데…(웃음) 너무 이상하다 싶었어요.
본격적으로 노조 설립은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비슷한 시기에 회사 비행기 사고가 4건 정도가 났어요. 괌에서 추락해서 250명이 사망한 것 포함해서요. 그 괌 비행기는 바로 전 주에 제가 몰던 거였고, 그때 돌아가신 기장님이 저랑 가족여행을 함께 가자고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 상하이에서 난 화물기 사고는 제 친한 후배가 부기장이었고요. 밖에서 볼 때는 대한항공 사고지만, 조종사들 입장에선 동료들의 일이죠. 제 일이기도 하고.
제주 훈련원 출신 모임 임원 일을 하고 있었는데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밖에서 보기에는 조종사들이 좋은 직업처럼 보이는데, 안에서 실상을 보면 근무환경이 아주 열악했거든요. 조종사들은 군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때만 해도 상명하복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죠. 힘든 상황이 많아도 환경을 바꾸려는 생각보다는 친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견디는 사람이 많았어요.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81학번인데, 한창 학생운동 많이 하던 때죠. 특히 사회학과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아도 사회구조를 논하는 책은 읽어야 대화가 되는 분위기였죠. 그러다 보니 사회를 구조적으로 보는 데에는 익숙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이 떠올랐죠.
조종사들의 무리한 스케줄이 원인이라고 보셨던 건가요?
그렇죠. 항공법과 운항규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공법은 아주 큰 담론이고 자세한 규정은 회사에서 알아서 정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노조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회사가 합의를 해야 할 대상이 생긴 거죠. 그 이후에 바뀐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만큼 문제가 많았던 거죠.
가장 대표적인 게 운항시간이에요. 그때 많이 타는 친구는 한 달에 150시간도 탔어요. 한 번은 에어프랑스 기장이 그 얘기를 듣더니, 그건 사람이 할 수 없는 시간이라며 안 믿더라고요. 비행하면 시차도 있고, 특히 조종사들은 이착륙할 때 스트레스가 커요. 크리티컬(critical) 11분이라고 해서 그때가 가장 위험하거든요. 전체 운항시간도 정상 범위로 줄이고, 하루 이착륙 횟수도 최대 4회로 줄였어요. 그러고 나서는 인명사고가 없었죠.
노조 결성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에 설립 신고서 냈을 때는 반려됐어요. 조종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다, 비행할 때는 청원경찰 역할도 해야 하니까 준공무원이다 하며 여러 이유를 만들었어요. 첫 설립 신고서 내고 4명이 정직 3개월을 받았는데, 그때 그걸 계기로 3분의 2 정도 되는 조종사들이 노조 가입하겠다고 힘을 모아줬어요. 의리가 정말 좋죠. (웃음) 운행에 바로 지장을 줄 수 있는 규모가 되니까 회사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죠.
노조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도 하셨어요. 어떤 맥락이었나요?
병사들도 결국은 월급 받고 일하는 노동자라고 생각했어요. 사용자인 국가에서 내린 결정으로 결국 피해는 노동자가 봐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노동자의 보호라는 큰 틀에서 반대 입장을 낸 거죠. 노동조합이 심플해요. 결정권자의 잘못된 결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거죠. 더 적극적으로는 그 결정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거고요.
해고는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나요?
노조가 설립되고 외국인 기장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노조에 가입 못하는 기장 비중을 늘린 거죠. 그런데 이게 기존에 일하던 조종사들의 인사 적체를 불러와요. 그래서 세 번째 파업을 했는데 이게 결국 불법파업으로 결론이 났죠. 사실 파업 시작하기 전에 해고될 걸 알았어요. 당시 사무국장 형과 파업 전날에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고 노동조합에 요구하는 게 있는데 시작 안 할 수 있냐는 결론이었죠. 총 4명이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고, 그 안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았어요.
구치소 생활은 어떠셨나요? 흔히 하는 경험은 아닌데.
100일 정도 지냈어요. 저는 사실 편한 측면이 많았어요. 우선 노동조합 일을 안 해도 되잖아요. 결정할 것도 너무 많고 갈등도 많았는데, 조금 쉬는 느낌이랄까. 조종사들은 노조 전임을 할 수는 없어요. 자격 유지를 위해서는 일정 시간 비행을 해야 되니까.
구치소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아내가 면회 와서 왜 이렇게 얼굴에 살이 오르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잠도 많이 재우고, 운동도 시켜주고. 책도 볼 수 있고. 체질이었나 봐요.
우리는 감옥 안에서도 나름의 특별대우가 있었어요. 사실 외부에서 옥바라지하는 사람들이 힘들죠. 걱정도 많이 하고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내가 있던 곳은 투쟁의 세계고, 여기는 마음을 바라보는 치유의 세계구나 싶었어요. 문득, 이 두 세계가 왜 연결이 안 될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은 마음 때문에 투쟁도 하는 건데. 행복해지려고 하는 건데. 이 둘을 내가 연결을 못 지으면서 살아왔구나 생각이 들었죠.
상담 공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출소하고 노조 상근직으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 2005년 영종도 파업이 있었는데 그 파업에서 참패를 했어요. 얻는 것 하나 없이 복귀했죠. 그때 노조 힘이 많이 약해졌어요. 공익 업무를 하는 사기업에 대해서도 파업을 제한하는 법도 그때 생겼어요. 항공사, 방송사, 병원 등에 적용되는 거죠. 그러면서 항공 노조가 힘이 약해졌어요. 이때 다른 노조 운영진과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는 나왔죠.
나와서는 대안학교 일을 주로 했어요. 그러다 문득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었고, 정확히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다니던 회사 지인 중 심리학과 출신 직원에게 상담을 했더니 지도교수를 소개해줬어요. 지도교수가 상담 공부를 추천했고,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한 번 들어가 보라고 제안을 해 주었어요. 들어가 봤더니 완전히 신세계가 열리더군요. (웃음)
집단상담 첫인상은 어땠나요?
첫날 작살이 났어요. 그때 나는 나를 잘 몰랐어요. 제가 간 모임엔 총 30명 정도가 있었는데 25명이 심리학 전공자였어요. 다들 미세한 마음을 논하는 데 선수들인거죠. 거기서 좀 아는 척하다가 집중포화를 받았어요. 그러고 났더니 다음날은 가서 펑펑 울면서 고백을 하게 되더라고요. 덩치도 산만하고 나이도 있는 사람이 우니까 위로도 좀 받고요. (웃음)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내가 있던 곳은 투쟁의 세계고, 여기는 마음을 바라보는 치유의 세계구나 싶었어요. 문득, 이 두 세계가 왜 연결이 안 될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은 마음 때문에 투쟁도 하는 건데. 행복해지려고 하는 건데. 이 둘을 내가 연결을 못 지으면서 살아왔구나 생각이 들었죠. 수소문해서 상담 공부 방법을 찾아서 대학원에, 그것도 재수해서 2009년에 입학했어요.
정혜신 박사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 영도 공장에 모이는 일종의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당시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고공농성 중이었는데, 응원 캠페인이었죠. 나는 파주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투쟁 모금 지원을 위해 책을 팔았어요. 그 책을 사서 읽는데 정혜신 선생님 이야기가 있었어요. 공권력에 의해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는 내용이었어요. ‘아,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인 통해 메일 주소를 구해서 나에 대해 자세히 썼어요. 정혜신 선생님이 밥을 먹자고 해서 먹고, 같이 일을 하기로 했죠.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일을 하기에는 스펙이 좋아요. 노조도 했고, 구치소도 다녀오고. 노조의 지원기금이 있어서 생계는 지원기금으로 유지가 되니까요. 정혜신 선생님이 탐낼만했죠. (웃음)
처음 함께 하신 일은 어떤 일인가요?
그때 정혜신 선생님이 한창 지인들과 함께 ‘와락’이라는 심리치유공간을 만들던 때였어요. 나는 상담을 공부했으니 상담 자원봉사자로 시작했죠. 그러다 서울에서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이하 맘프)라는 프로그램을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고, 5주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고 나서 이걸 치유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비영리 민간단체가 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싶어 지금은 사단법인인 ‘공감인’이 만들어진 거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바로 호스트가 되어 프로그램을 열 수 있나요?
중간 과정이 필요해요. 진행자 교육 과정이 따로 있어요. 지난 주말에도 헤이그라운드 지하에서 20명 정도가 함께 했어요. 교육 수료한 사람들이 공감인이 여는 세션에 진행자로 들어오는 거죠. 개인이 열 수 있는 비용은 아니에요. 6주를 한 번 돌리면 약 700만 원 정도 들어요. 대관 비용에 밥값에 인건비도 드니까요. 선뜻 개인이 할 엄두가 나는 비용은 아니죠.
대표님 스스로는, 치유가 된 느낌이 드시나요?
보기에 어떠세요? (웃음)
저희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십니다. (웃음)
아무도 몰라요. 늘 치유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느낌은 들어요.
예전에 스스로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셨나요?
정말 몰랐어요. 지나고 보니까, 내가 참 이런 과정이 필요했구나 싶어요. 삶이 마음대로 안된다는 느낌을 포함해서 늘 어떤 불편하다는 감은 있었어요. 대학원 공부하면서 우울증 대학생의 일기장을 보게 됐는데 내 대학 때 일기와 너무 똑같은 거예요. 아, 내가 대학 때 우울증을 앓았구나 생각했어요. 모르면 안 보여요. 알고 나니 그때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다고 느껴요. 노조도 비슷해요. 노조가 있는 직장을 경험하고 나면, 노조 없는 직장이 참 불편하죠.
이야기가 조금 돌아왔는데, 그래서 치유가 됐냐는 질문에는, 조금 된 것 같아요. 사람이 치유가 된 만큼만 치유할 수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조금 됐고, 계속 진행 중인 것 같아요.
치유에 대한 대표님만의 정의가 있나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죠. 감히 제가 치유에 대한 정의를 한다는 게. 그래도 굳이 해 보자면 ‘자기를 만나는 경험’, ‘새롭게 자신을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고 봐요. 사람이 힘든 건, 느낌이나 감정을 못 만날 때 혹은 느낌이나 감정에 휘둘릴 때 큰 문제거든요.
양극단이네요.
네, 양극단이죠. 잘 못 만나면 답답하고, 너무 휘둘리면 짜증 나고. 대부분 경험을 해요. 그 감정들을 편하게 만나는 경험을 해 가는 과정이 치유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맘프 때도 계속해서 감정과 느낌을 물어봐요.
치유의 과정이 단계적인가요? 알고 나서 받아들이고, 그러고 나서 편해진다거나요.
잘 분리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동시다발적으로 한 번에 다 오기도 해요. 이론적으로 단계가 설명은 가능한데, 실제로 현장에선 그게 딱 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람이 참 복잡한 존재거든요. 그리고 요즘 이런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들 여유가 없어. 일주일에 한 번 씩 6주 참여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워하고, 첫 주 와 보고 즉각적 효용이 없다 싶으면 지속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아요. 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점점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치유라는 키워드에 있어서 어떤 환경인가요?
굉장히 힘든 환경이죠. 저희 어머니가 33년생이신데 일제시대, 한국전쟁, 독재정권, 산업화, 민주화, IT혁명 다 겪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사회가 안정적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을 거예요. 전쟁터나 마찬가지죠. 전쟁터의 기본 속성이 신뢰가 없다는 거예요. 신뢰에 대한 욕구는 강한데 누굴 신뢰해야 할지 모르는 거죠. 그리고 격변하다 보니 너무 다른 경험을 한 세대들이 같이 살고 있어요. 불안이 높고, 결과적으로 우울이 많아요.
저도 우리 사회가 너무 격차가 큰 세대들이 모여 산다고 느껴요. 이런 상황에서 치유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우선 참 어렵다는 말로 시작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사회구조적인 얘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정혜신 선생님 말을 인용하면, 정말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굉장히 취약한 자본주의라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착취당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다 보니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을 만날 여유가 별로 없죠. 그러다 보니 병으로 치면 굉장히 중증이 되어서야 상담이나 치유를 찾아요. 전쟁터의 속성은 갖고 있어서 불안은 큰데, 여유가 없는, 총체적 난국이에요. 그래서 자꾸 구조를 이야기하게 되고,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일도 하게 됐어요. 신뢰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통통톡이라는 프로그램도 하시죠?
삶을 힘들게 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사회 활동가들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회 활동가들의 삶이 건강하기가 어려워요.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활동을 해야 한다고 믿어요. 그러려면 이들의 심리를 치유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런 생각이 반영된 것이 사회 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통톡(通統talk)이죠.
진짜 나를 만나는 경험을 꼭 해 보면 좋겠어요.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무엇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느끼세요?
나는 타고난 성향이 탐구자에 가까워요. 내 삶이 불편했던 이유를 끊임없이 파고 들어서 알아내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과정 속에 있고요.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죠. 이 글 읽는 분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꼭 한 번은 따라가 봤으면 좋겠어요. 외국에 나가듯이 내 밖으로 한 번 나가보거나, 진짜 나를 만나보는 경험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모두 그렇지는 않을 수 있지만, 안 해 보면 후회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Editor : 김와이, 황단단
Photo : 이형우
하효열은 치유활동가 집단 사단법인 공감인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공감인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gonggami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