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
FRAME은 헤이그라운드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브랜드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특유한 시선들'을 담습니다.
너무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정도는 덜해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정말 너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실은 바쁜 삶을 동경했기 때문에 그런 말은 그냥 푸념이었던 것이죠. 저에게 바쁜 삶은 때로 멋진 삶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말이었습니다. 찾아주는 사람이 많고, 할 일도 많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바쁜 시간을 쪼개 끊임없이 뭔가를 해내는 사람이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열정을 갖고 있는 삶 같잖아요.
만약 누군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가 가진 열정을 저라는 사람 바깥에서 쏟기 바빴습니다. 가족, 친구, 관계, 일 뭐 그런 것들이었죠. 사실 저와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나의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쁨과 시선에 좀 더 치중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자주 지쳤고 그럴 때마다 어딘가 떠나야만 했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겼던 시절입니다. 제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을 수 있었고,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은 델 가고 쉬고 싶을 때 그냥 멍하니 쉴 수 있었거든요.
저는 바다를 무척 좋아해서 제주를 자주 가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한 바다마을에 숨어 지내곤 합니다. 운전을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제가 하도 뻔질나게 제주를 들락날락하니까 사람들은 자꾸 가도 또 볼 게 있냐고 묻는데 저는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가는 거라 자주 가도 질릴 일이 없어요. 그런데 누가 어디 갈만한 데 좀 추천해달라고 하면 말문이 턱 막힙니다. 저의 3박 4일 일정이 누군가에겐 길어야 반나절쯤 되는 수준밖엔 안되거든요.
제가 혼자 가는 여행지에서 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늦잠을 자고, 근처 밥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돌담길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산책하고, 바다 앞에 넓은 천을 하나 깔아 두고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도 아니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봅니다. 여행객을 만나면 종종 사진도 찍어드리고요. 바닷바람을 많이 맞았다 싶으면 카페에 들어와 쉬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기분이 내킬 땐 같은 숙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요. 이렇게 똑같은 일을 갈 때마다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요.
이런 여행을 몇 번 하면서 제가 찍은 사진을 돌아보니 제가 어떤 것에 주목하고 감동하는 유형의 사람인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문틈으로 햇볕이 드는 나른한 오후, 귀여운 글씨체의 안내판, 바다를 닮은 파란색 소화전,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동네 강아지,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 바람에도 끄떡없는 야자수, 해가 질 때의 보랏빛 해변 같은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에 주목하는 걸 발견하면서 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조금씩 제가 가진 열정을 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일이 더 이상 족쇄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일과 삶을 나누기보다는 되려 일과 삶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됐습니다. 사는 게 일이 되기도 하고, 일이 사는 게 되기도 하고요.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일과 삶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완벽하게 하고 싶은 일은 아니어도, 지금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를 기쁘게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게 훨씬 즐거워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한바탕 울어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풀면 그만입니다.
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명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아직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듬직한 형이 되는 것이 작고 보잘것없는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착한 사람으로 사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누구도 자신의 꿈을 시시하고 볼품없다거나 또는 거창하다거나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자격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자신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고요. 뭔가를 배우고 얻으려고 떠나는 여행은 아니지만, 저는 조금씩 단단해져서 돌아옵니다. 서울에서도 제주에서처럼 건강하고 심심한 삶을 꿈꾸면서요. 모두에게 통하는 방법은 아닐지라도, 한번 떠나보면 어때요? 게다가 지금 제주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계절을 보내는 중이랍니다.
Writer 누들 - 슬로워크 오렌지랩의 마케팅 라이터. 오렌지 레터 에디터. 브런치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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