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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Nov 12. 2020

당신의 인형을 기억하세요

나에게 글쓰기란


여섯 살 때쯤인가. 엄마와 미도파 백화점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꿈꾸던 궁전보다 근사했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샹들리에, 코끝에는 새것의 냄새, 바닥에는 반질반질한 대리석까지. 창문이 하나 없어 탁한 공기가 자석처럼 달라붙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우아해 보였다. 바닥에 발이 미끄덩댈 때마다 궁전에 어울리는 아이가 되고 싶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엄마의 손을 꽉 잡았다.

    

반짝반짝한 물건들이 깔끔하게 진열된 세상이 휘황찬란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몸이 움직이고 손이 다가갈 때마다 엄마는 “만지지 마!”라는 말로 바로 저지시켰다. 단호하고 낮은 목소리. 엄마의 시선은 내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나는 메마른 침만 꿀꺽 삼킬 뿐 나와 다른 세상을 쉽게 다가서지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날 엄마가 미도파에 갔던 이유를 똑똑히 기억한다. 엄마 고향 분인 아주머니와 아들이 우리 집에 며칠 묵은 적 있었는데 그 아들 선물을 사주려고 간 것이다. 그 아들은 나보다 오빠였는데 지적장애아였다. 엄마는 그 아들에게 갖고 싶은 장난감을 고르라고 했다. 요 며칠 엄마는 내게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던 일을 친구 아들에게 해주었다. 당시 최고의 시리즈 ‘영구 없다’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그 아들에게 보여주는 덕분에 난 처음으로 같이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내가 들어 본 적 없었던 말을 그 아들에게 했던 것이다.

   

엄마를 사랑했던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왔던 고향 친구분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마음. 가진 게 별로 없는 엄마가 최고의 것을 해주고 싶었던 마음.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 아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장난감 코너를 돌아다니며 선물을 고를 때 내 마음을 사수하던 뚝방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궁전 같은 미도파에 장난감 코너를 다시 오기 힘들다는 본능적인 예감. 난 인형 코너로 달려갔다. 매의 눈이 되어 맘에 드는 인형을 찾았다. 금발 머리 파란 드레스를 입은 바비 인형. 나도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단번에 안 된다고 내 손을 끌었다. 우아함이 깃든 조용한 곳에서 쓰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내 것을 요구하고, 사달라고 한 적이 처음이었다. 쪼들린 형편에 사달라는 말은 죄의식이 드는 말이었다. 과자 한 봉지 사달라고 말한 적 없던 내가 바비 인형은 너무나 비싼 가당치 않은 선물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뿌옇게 흐려졌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럽게 울었다.


엄마는 난감한 듯 “얘가 왜 이래”라고 했지만 내 손에 안겨주셨다. 그 인형은 아무것도 없이 외로웠던 내 곁을 지켜주었다. 바비 인형의 미소는 언제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게 한없이 다정해서 ‘다정’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금발 긴 머리를 빗겨주고, 단벌밖에 없어서 손수건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주었다. 오래토록 내 품에, 내 손에 들려 있던 바비 인형의 팔 한쪽이 그만 빠져버렸다. 외팔이가 된 바비 인형이었지만 내 눈에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형이었다.




최근 독서심리상담 교육을 받다가 선생님이 어린 시절에 떠올리는 장면을 그려보라고 했다. 난 일로 바쁘신 부모님, 학교에 가고 없는 언니, 오빠, 혼자 방에서 외팔이 바비 인형을 갖고 놀고 있는 나를 그렸다.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시더니 해석해주셨다.


혼자 남겨졌을 때 당신 곁에 뭐가 있었나요?
당신에겐 인형이 있었어요.
팔이 한 쪽 빠져도 당신은
그것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어요.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당신의 인형을 기억하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기억할 인형은 아마도 글을 쓰는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팔 빠진 인형처럼 부족하고, 완성되지 않은 글. 구멍난 팔이 부끄러워도 내가 매만지는 동안 행복했던 일. 아무도 없어서 인형과 주고받았던 이야기처럼 내 안에 나와 속닥거리는 글쓰기. 쉽게 버릴 수도, 버려지지 않았던 글쓰기. 외로움도 배고픔도 잠도 잊어버리게 만들던 글의 이야기.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오늘, 까맣게 타버리는 밤이 이젠 외롭지 않았다.


어린 시절 떼쓰며 처음으로 안아본 바비 인형이 이토록 큰 의미가 되어 돌아오다니. 다정이가 마지막까지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너의 인형을 꼭 기억하라고.





그림: Claude Renoir Playing -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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