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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Dec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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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마음을 끙끙 앓았다. 한 해를 돌아보는 12월이어서 그랬을까. 며칠 뒤면 내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는 두려움이었을까. 달력에 보이는 날짜와 현재의 시간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느껴졌다. 정처 없이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땅바닥으로 마음이 꺼져갔다. 장밋빛 미래가 사라지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난 무엇을 위해 글을 썼던 것일까? 근원적인 질문 앞에 난 땅속의 굴을 파고 들어가 버렸다.


올 한 해는 코로나로 인해 일상의 속도가 느려진 만큼 자신에게 집중하고 보살폈던 시간을 보냈다. 강요된 일상이 아닌 내가 선택한 일상. 어느 때보다 즐거웠고, 열심이었다. 그중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위해 글을 썼다. 새록새록 이슬이 맺히듯 마음이 차오르면 글을 썼다. 어떤 글은 내 마음을 비워낼수록 채워질 때가 있고, 어떤 글은 민낯이 드러날수록 쓰라렸다. 글을 쓸수록 마치 고스톱의 패를 들킨 기분. 나의 수가 읽히는 거 같았다.

  

게다가 가까운 이들을 이야기로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해석한 생각과 느끼는 감정으로 쓰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싶어서 글을 썼는데 혹시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내게 위로받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이 되지는 않았을까. 글을 쓰고 올리는 자체가 너무 좋아서 나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세심한 배려가 없지는 않았을까.


간혹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아는 척하는 소리도 달갑지가 않았다. 나에게 아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꺼내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글을 쓰면서 유익했던 만큼 어려워진 부분도 생겨났다.

   

무수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찔러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소중했던 순간들이 무색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걸었더라? 이제 막 내딛던 걸음이 어색해졌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처음의 마음을 더듬어보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세련되고 고상하게 걸음걸이를 바꿀 수 없을 거 같은데. 신비스럽게 감출 수도 없는데. 생각이 복잡해지자 어정쩡한 걸음이 꼬이다 못해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굴속으로 도망쳤다. 게임의 세계로. 눈에 띄는 광고를 클릭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10년 전 애니팡을 핸드폰에 깔았을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임신했을 때 아이를 키우는 삶이 엄습하자 이성의 마비가 찾아왔다. 그때 나는 유행하던 애니팡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계에 부딪혀 얼마 안 가 그만두었지만. 평소 게임을 안 좋아하고, TV에 게임 광고가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지 못마땅해하던 나였다. 지인이 게임하다가 배우자를 만나 지금도 게임이 유일한 낙이라는 말에 혀를 끌끌 차던 내가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익명과 캐릭터로 숨어버렸다. 무기력하고, 우울하다는 증거였다.


비록 초등 아들이 친구가 하는 게임보다도 더 유치해 보인다는 ‘숨은그림찾기’ 게임. 감쪽같이 숨겨진 물건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미션이 주어질 때마다 난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찾았다. 가까스로 깰수록 성취감을 느꼈다. 그 안에서 내 안에 있는 문제들도 맴돌았다. 현실이 압도될 만큼 내가 어렵게 느낀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토록 찾고 싶은 건 무엇일까. 이렇게 안간힘으로 찾듯이 내 인생의 비밀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정원 가꾸기’ 게임. 같은 색 구슬끼리 연결해서 판을 깨는 게임이었다. 한 판, 두 판을 깰 때마다 정원이 수리되고 예쁘게 정돈되었다. 갈수록 어려웠지만 시간과 에너지만 있으면 못 깨는 판도 없었다. 왜 사람들이 게임에 빠지는지 이해가 되었다.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이틀을 꼬박 폐인처럼 게임을 했다. 현실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방치하고, 게임에서 미션을 클리어했다.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실패를 거듭했다. 여러 번 실패 끝에 찾아오는 성공은 짐스러웠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현실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달라진 건 없는 데 그리 심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아무런 미련 없이 게임을 삭제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았다.


게임의 후유증이 남긴 했다. 집안에서 현실판 숨은그림찾기를 했다. 거울 앞에 있는 귀마개를 찾아내고, 양말 한 짝을 찾았으며 효자손을 찾을 수 있었다. 게임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이 생겨났다. 또 정원의 가꾸기처럼 내게 펼쳐진 집안일을 도장 깨기처럼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날 해야 할 설거지, 샌드위치 만들어 먹기, 아이가 먹고 싶은 떡볶이 만들기 등 주어진 미션을 우선순위를 세워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저물어갔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실패를 할지라도 어쨌든 이걸 끝내야 다음 퀘스트로 넘어갈 수 있다는 명료한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해낼수록 레벨이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글 쓰는 게 어렵다. 글을 쓴다는 건 아이템이 필요하고, 시간과 에너지가 축적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다. 지금의 고민이 다음 퀘스트를 넘어가기 위해서 꼭 맞닥드려야 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다시 한번 서성인다. 풀어야 할 퀘스트가 많다. 그만큼 부딪히며 경험할 게 많다. 고민하는 만큼 달라지지 않을까. 숨은그림찾기 같은 인생을 열심히, 또는 느슨하게 찾다 보면 감춰진 비밀들이 보이지 않을까. 난 그렇게 다음 퀘스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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