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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Jan 07. 2021

나의 분신, 냉장고


2021년 새해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새해는 마치 목욕탕에서 마지막 의식에 이루어지는 냉수마찰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새로워지는 느낌. 리셋되어 다시 무언가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새해는 말갛게 씻은 얼굴로 내게 찾아온다.


본능적으로 처음 손에 잡힌 것은 청소. 안 쓰는 물건을 버리면 버릴수록 집은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청소기를 밀고 옷장을 정리하고 수납공간을 정돈했다. 그중에 가장 보람된 건 냉장고 청소. 나 자신이 환골탈태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냉장, 냉동고를 한바탕 정리했을 뿐인데 일주일이 도록 신선하고 산뜻한 기분이 유지되다니. 새해와 딱 맞아떨어진 이 기분은 뭐지? 냉수마찰처럼 개운한 이 마음은 뭐지? 어느새 냉장고가 나의 분신으로 스며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루의 승부를 건 곳이, 바로 냉장고라는 사실. 아침에 배고프다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마성의 힘처럼 잠자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남편이 나 대신 끼니를 차려줄 때면 왠지 미안해서 떳떳하지 못했다. 내 일을 간과한 느낌이었다. 메뉴를 고민하고, 마트를 가고, 한참을 서서 음식을 대령하면 몇 분 만에 가족들은 밥을 다 먹었다. 아이들은 밥 먹고 돌아서면서 배고프다고 했다. 나에겐 거대한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간식의 비중도 컸다. 배부른 아이들을 보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한 입 떠먹자마자 표현하는 엄지 척에 매달렸다. 언제부터 밥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까. 어느새 냉장고와 나는 동일시가 되어 있는 걸까. 냉장고가 가벼워질수록 내 마음도 가벼워졌고, 채워질수록 든든했다. 24시간 풀가동하는 냉장고가 내 성적이요 미래였다.


냉장고가 비우고 채워지면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감기 예방을 위해 생강을 곱게 다져 생강청을 담갔다. 한 시간 이상 달여서 밀크티 쨈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김에 한 장 한 장 찹쌀풀을 바르고 식품건조기에 말리고 튀겨 김부각을 만들어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에 비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구석에 있던 널찍한 늙은 호박으로 호박 수프를 만들었다. 그밖에도 실패했지만 팟타이와 반쎄오를 만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끼니를 차리고 치웠다. 보람도 있었다. 시도하지 않았던 음식을 만드는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하지만 냉장고를 하루에도 수시로 열고 닫다 보니 여기가 내 무덤이요, 내 관짝 같았다. 리셋되어 잊고 있던 현실이 일주일 만에 찾아왔다. 맛에 있어서 금방 싫증을 내는 탓에 매 끼니를 새롭게 차려야 했다. 나는 뚝딱 손맛 내는 요리왕이 아니다. 아이디어는 금방 고갈되었다. 밥 한 끼에 매달려 마트를 들락날락해야 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은 뭘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요리야말로 다양한 창의성과 꾸준한 지구력이 필요로 하는 과학적이면서도 생활 밀착형 독창적인 분야 아니던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요리 삼매경에 빠지고 싶지만 나는 벌써 지쳐 먹고 싶은 것이 사라져 버렸다. 요리 경기에 체급이 낮은 선수는 오버할 수 없다.

   

맛이 주는 즐거움이 큰 만큼 맛에 대한 희생이 따르는 법. 변하지 않는 사실은 매년 이어지고 있다. 밥을 차리는 게 나의 본캐일까, 부캐일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일상에 난 오늘도 밥을 차린다. 어려우면서도 쉬운, 쉬우면서도 어려운 요리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리뿐만이겠는가. 오버하면 질려버린다. 그러니 새해 다짐 같은 건 안 하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부담 갖지 말자.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자. 너무 애달파하지 말자. 더 좋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집착하지 말자. 충분하니까. 자연스럽게, 편하게.


it's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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