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 있는 May 05. 2021

도서관에 기적이 있다면


초등학생 시절, 도서관이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도서관이 좋았다. 그곳은 조용한 자유가 있던 곳이었다. 나를 애써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았던. 나의 존재를 차분하게 환영하던 곳. 도서관 가는 날은 주로 비가 내렸던 날이 많았다. 날씨가 쨍쨍한 날은 운동장에서 놀기 바빴으니까. 그런데도 도서관을 떠올리면 창밖에 노오란 햇살이 나무 테이블과 의자를 환하게 밝혀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날씨와 상관없이 위안이 되었던 곳이라서 그런가.


집에도 책은 많았다. 학습 위주의 전집류여서 그런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지만. 책장이 쏟아져 무너져 내릴 거 같은 부담감, 거금을 들였는데 읽기 싫었던 죄책감. 구속적인 느낌이 강했다. 지금도 안 읽은 책이 집에 많다. 소유하는 거만으로 그 책이 내 것이 되는 거 같아서 구매하곤 했다. 하지만 줄곧 미뤄버리는 게으름은 짐이 된다. 정작 좋아서 다시 읽는 책은 거의 없고,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쉽사리 처분하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조용조용, 사뿐사뿐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서가에 촘촘하게 꽂혀있는 책들은 관객처럼 날 반겨주는 거 같다.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인데 언제나 쇼를 벌이는 건 책의 몫이다. 단순하거나 화려하게, 얇거나 두껍게, 크고 작게, 깊거나 더 깊게. 여러 대안으로 비교 대상이 되어주었다. 자신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진실한 이야기들. 민감하게 촉수를 세운 나의 선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곳.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최초의 공간.


대학교에서도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책을 읽는 건 아니었다. 사실 차분하게 앉아서 한 권의 책에 집중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오래된 관객, 고전부터 새로운 관객 신간까지.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 제목을 훑어보는 자체가 즐거웠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찡한 교감을 즐겼다. 그저 제목만 읽어도 책을 다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제목만으로 추측하고 상상하기도 하고. 또 책을 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내 책은 없을까 싶기도 했다. 혹은 내가 책을 낸다고 해도 수많은 책 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은 뒤돌아서기도 하면서.



   

감사하게도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 내가 이사를 오고  3년 뒤에 서울 최초 기적의 도서관이 세워졌다. 개관하기 전날 아이를 등에 업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도서관 안에서 책 정리하는 사서가 내일 오시라는 말이 무슨 약속처럼 얼마나 설레던지! 다음 날 두근대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벅차올랐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낮은 책꽂이, 책꽂이 사이 폭신한 의자, 도서관 중심에 나무와 풀이 보이는 통유리, 놀이터가 보이는 전면 유리창. 시골 같은 우리 동네에 이런 공간이! 감개무량했다.(그때 받았던 기념품 자석과 손수건은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어린이 도서관이 생긴 이후로 동네에 변화가 생겼다. 아이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그림책 전시, 문화공연 등. 책을 매개로 사람을 모으고, 지식과 문화를 공유했다. 먹고 살아갈 기술을 알려주는 건 아니었지만 일상을 풍요롭게 했으며 내적인 힘을 길러주고 활력을 주었다. 도서관에서 수시로 책을 빌렸고, 알찬 프로그램을 누렸다. 부모님 집도 대책 없이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데 도서관만큼은 눈치 없이 아무 때나 방문할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프로그램이 협소해지면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도서관에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서 말이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특유한 침착함으로 사람들을 대해주는.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웃지도 않았던.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키던 빛나는 사서들.


도서관마다 구비하는 책 종류가 달라서 아이가 원하는 책을 대출하러 여러 도서관을 방문하는 일이 생겼다. 도서관 건물마다 느낌이 다르고, 소장하는 책의 분위기만큼 사서들도 달랐다. 혹여나 무슨 부탁이라도 할까봐 눈도 안 마주치고 일하는 사서,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서 책을 대출해주는 일이 갑처럼 느껴지는 사서. 또 새로 알게 된 어떤 사서는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방문을 꺼리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겨우(?) 빌려오면 왠지 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서가 되어야 한다는 명언을.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어준 편안함이 내가  동네 도서관에서 안식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걸 밝혀주었다.


사실 도서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를 뿌리는 곳이 아니던가. 당장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고, 보이지 않는 열매를 얼마나 어떻게 거둘지 모르지만 사람과 마을을 성장시키는 곳. 중심에는 사서들이 있다. 책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해주고, 사서들은 그 공간을 편안하게 내어주는 사람들이다. 온종일 책과 씨름하는 사서들을 보면 무한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감정이 따른다. 그렇게 애쓰는 그들에게 무언가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누군가 도서관에서 위안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서들이 주는 기운이라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책과 사람을 담는 도서관이 기적이 된 이유이고, 우리 안에 작은 기적을 꿈꾸는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인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