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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 언어가 위스키라면

by 장동혁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그날 우리는 모임에서 읽을 책을 선정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활발했고 다들 좋은 책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한 회원이 불편해 보였다. 함께 모여 책을 선정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그냥 대학 선정 도서 목록에서 정하면 안 되나요?” 그러면서도 몇 권을 언급했는데 주로 인문 고전이었다. 당연히 그중 하나일 줄 알았다.

그러다 그 회원이 갑자기 생기를 띄며 말했다. “아! 한 권 떠올랐어요!”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아뿔싸, 전혀 예상치 못한 중년의 호르몬에 관한 책이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란다. “나이가 들다 보니 건강에 관심이 생기지 뭐예요!”라며 이유까지 덧붙였다.


명작들을 그렇게 나열하더니 하필 자기계발서라니...


순식간에 기대가 무너져 내렸다. 슬쩍 다른 책으로 유도할까 하다, 괜히 찬물 끼얹는 것 같아 넘어갔다.




집에 돌아와 모임 일정을 잡는 데 그 책이 자꾸 걸렸다. 다양한 연령대가 있는데 건강이나 호르몬 주제가 괜찮을까? 젊은 친구들 그날 안 나오는 거 아냐? 모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한 모임에 찬물을 끼얹을 것만 같았다. 자기계발서보다는 인문 고전을 주로 읽어온 클럽 전통도 한몫했다.


결국 그 회원에게 전화했다. “이 책도 좋긴 한데, 혹시 그날 추천하신 책들 중 다른 책 없을까요?” 짧은 침묵 뒤 예상치 못한 말이 따라왔다. “왜, 제가 추천한 책이 마음에 안 드세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놀란 나는 수습에 들어갔다. “아, 그건 아니고요. 그. 책도 괜찮은데 혹시 다른 책도 같이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해서요” “없다면 그냥 이 책으로 하셔도 돼요”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어긋나 있었다.


아니 맘에 안 들면 안 든다고 하지 왜 돌려 말하세요?


어색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끝났고, 그날 이후 나는 그 회원 달래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모임 좋게 만들어보자는 데 그것도 이해 못 해주나 억울하기도 했다. 결국 그 책 나누기로 한 날 그녀는 나오지 않았고, 이후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잘 보여준 사건이다. "다수가 공감할 만한 주제를 함께 찾아보자"는 선한 의도가, 남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교훈 하나를 얻었다.


메시지를 만드는 건 화자지만 해석은 청자 몫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좋은 의도를 잘 다듬어진 말에 담아 보내도, 상대가 다르게 해석해 버리면 그만이다.



통신 기술이 발전하며 사람 간 물리적 거리를 없앴고 잡음도 잡았다. 이젠 더 이상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붙잡고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심리적 오류만큼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때로는 상처를 준다.


그 어떤 선한 의도나 미사여구도 상대가 “무시당했다”라고 느낀 순간 소용이 없다. 이 말은 소통에서 메시지를 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화의 맥락, 즉 대화가 오가는 길인 관계를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가 좋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나는 내 말을 받아들일 그녀 상태와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 등을 살폈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나눌 의사가 있는지도. 하지만 나는 그 책이 모임에 적합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급급해 설익은 소통을 시도하고 말았다.



이럴 때 우리는 억울해하며 항변한다.


다 너를 위한 말인데 너는 왜 그렇게 안 받아들여!


그럴수록 오류는 심해질 뿐이다. 그런 사람을 칭하는 말이 있다. '독재자' 또는 '스토커'다. 내 의도가 좋으니 너희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집에나 스토커 하나씩은 있다.


대화, 참 어렵다.

그날 나는 좋은 재료 빚어 참나무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최고급 위스키를 건넸지만, 상대는 인공색소와 감미료로 맛을 낸 싸구려 위스키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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