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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으로 가는 환승역

의존과 독립이 균형잡힌 삶

by 장동혁
고추장 단지 하나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꺼내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구나. 보내는 물건 포 세 첩, 곶감 두 첩, 장볶이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 간에 반찬으로 하고 있니? 왜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 난 그게 포첩이나 장조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으로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소고기를 재서 담근 고추장을 아들에게 보낸 이 사람은 누구일까? 찬거리가 나열된 걸로 보아, 아들 끼니 걱정하는 시골 어머니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편지의 주인공은 연암 박지원이다. 오십을 넘긴 홀아비가 손수 고추장을 담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부엌을 넘나드는 건 큰 흠이었다. 게다가 감사할 줄도 모르는 자식 혼을 내기는커녕 연락 좀 달라고 애원한다. 유교정신이 장악하던 시대 보기 드문 일이다.


이처럼 편견이 없고 개방적인 그의 주위로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이덕무를 비롯한 서얼출신 인재뿐만 아니라 여자, 지나가는 노인, 외국인 할 거 없이 모두 그의 친구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홀로 있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약상 대신 술상을 들였다. 그렇게 그는 두런두런 들려오는 벗들의 대화 속에서 눈을 감는다.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보다 감추고 싶은 게 있을까.




사회적 고립 문제가 심상치 않다. 2017년부터 5년 간 고독사 수가 연평균 8.8%나 증가했다. 사망자 100명 당 한 명을 넘어선 것이다. 노년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 원인도 건강부터 경제, 대인관계 문제 등으로 다양했다. 삶의 종말을 예감하는 눈 빛 하나 받아줄 이 없이 생을 마감하는 이 비극의 시작은 어디일까.


세상이 하도 돈돈 하다 보니 경제 문제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고립의 원인 중 관계로 인한 문제가 적지 않았았다. 관계가 어려워지며 고립이 시작되고 고립되다 보니 관계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것이다.


그런데 고독과 고립 문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의존성 결핍이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걸 지나치게 힘들어하는 거다.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오히려 독립적인 사람이 관계를 잘하지 않느냐며 반문할지도 모른다.


맞다. 건강하게 관계를 맺으려면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의존성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면 독립성 못지않게 의존성도 중요하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성취를 숭배하고 능력주의가 판을 치다 보니 남에게 의존하는 걸 문제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의존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정색하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걸 목표로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부족함이 누군가에 받아들여질 때보다 관계를 깊게 만드는 일도 없다. 우정이나 사랑 같은 차원 높은 관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도움 준 상대가 존재감을 느끼도록 해줌으로써 상대를 세워줄 수도 있다. 이처럼 의존은 관계를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의존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건 설익은 과일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건강한 사람은 의존과 독립을 자유로이 오간다. 자기를 어렵지 않게 개방하고 약점도 편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상대 반응을 끌어냄으로써 상대를 사용한다. 이처럼 관계 속에서 상대를 사용하는 요령은 가정에서 길러진다. 우리는 부모를 안전하게 사용하는 경험을 익히며 자라다 성인이 되는 순간 독립하게 된다.

이에 반해 대상 사용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한 아이는 유사 독립성을 익히게 된다. 도움이 필요 없는 존재로 비치길 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함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린다. 유사 독립성의 가면 뒤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 완벽주의까지 겹치면 무채색으로 압축된 삶을 살 수도 있다. “모든 게 자기 하기 나름이니, 실패의 책임도 각자 져야 한다”는 강퍅한 신념을 갖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타인에 대해 엄격하고 인색하다.


그런가 하면 독립성만 있는 것보다는 의존성만 있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세상이 관계로 돌아가고 관계의 시작은 의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존성 안에는 상대에 대한 믿음과 받아들여지기 바라는 소망이라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독립성에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인생은 결국 홀로 짊어져야 할 짐이라는 냉혹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연스럽게 타인의 어깨를 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아쉬운 소리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남에게 의존하는 걸 폐 끼치거나 신세 지는 걸로 여기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의존성과 독립성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가


지금 내가 있는 곳 옆방에서는 실버들 노래 연습이 한창이다. 여남은 명의 할머니가 트로트를 구성지게도 부른다. 세상을 단순하게 그린 곡을 기교 없이 불러서인지 듣고 있는 내 맘도 편하다. 같은 곳을 자꾸만 틀리는지 그 부분을 반복한다.

“김 노인은 지가 대장인 줄 알어!” “아! 박 여사는 물건 아까운 줄 도 모른다니깐!” 이렇게 남의 흠만 잡으며 거리를 두다간 어느 날 고립무원에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홀로 고고한 취미를 찾아다니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모든 게 평준화 돼버린 사람들 틈에서 시름을 내려놓고 구성진 가락 한 번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의존이다.

삭막하고 고독한 시대, 어디에도 기댈 어깨가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독립으로 가는 열차에서 잠깐 내려 누군가에게 슬쩍 속내를 들켜보자.


내가 요즘, 좀 힘이 드네... 차 한잔 할 수 있을까?


* 편지 글의 출처는 <연암 서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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