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퀼리브리엄

관계의 위력

by 장동혁

2003년 가을, 직장 동료들과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이란 영화를 보러 갔다. 미래의 통합정부가 사랑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전쟁의 원인으로보고 감정을 말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인간의 감정이나 관계가 갖는 의미를 묻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인간의 감정이나 관계와 관련된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 감정은 약일까 독일까. 우리는 왜 예외 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까. 최고급 호텔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게 제공된다면 관계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전쟁이나 가정폭력 뉴스를 보고 있자면 차라리 감정이 사라지는 게 사회에 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타트업 기업에서 일하며 성마르고 자기중심적인 상사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던 때였다.


어린 시절 관계의 의미와 위력을 실감하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전쟁을 겪은 세대는 물론이고 전후세대지만 반공을 최상의 가치로 교육 받은 우리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1983년 5월 5일, 그날은 교회 다니는 청소년이라면 누구라도 한숨 쉬었을 일요일이자 휴일이었다. 목사님 아들인 친구도 분명히 실망한 눈빛이었다. 모처럼 대낮부터 티브이를 볼 수 있는 황금 휴일임에도 우리는 전도사님에게 붙들려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창밖 뭉게 구름이 우리를 희롱하는 가운데 파트별 연습이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집사님 한분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말 그대로 사색이 된 채. 그리고 외쳤다.


전도사님 큰일 났어요. 지금 전쟁 났어요!


...

순간 주변이 색감을 잃었다. 그리고 멈춰버렸다. 살짝 일그러진 전도사님 표정과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풍경은 섬광 기억으로 남아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신음 섞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마음이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지휘대에 양팔을 올린 채 말없이 서있던 전도사님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올게 온 것 같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나만 따라다니면 된다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차분하면서도 비장한 그분의 음성이 도리어 우리를 공포로 몰고 갔다. 생각해보면 그분 역시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에 불과했다.


MZ세대라면 ‘이 무슨 쌍팔년도 아재들의 신파극인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는 동서 냉전에다가, 남북 대치가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연초부터 북한은 팀 스피리트 훈련을 비난하며 준 전시상태를 선포했고, 티브이만 켜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애절한 곡과 함께 헤어진 가족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피켓이 화면을 가득 채우던시절이었다. 툭하면 울리는 사이렌도 가슴 졸게 만들었다.


얼마 안 되어 급보를 전했던 집사님이 머쓱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춘천 공항에 불시착 한 중공 민항기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마당에 모여 웅성거리던 우리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공이나 소련이란 이름만으로도 위압감이 들던 시대였다.




전쟁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와 함께 어떻게 다시 만나지?

였다.


그건 분명하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만날 방법과 장소를 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열이면 열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그 와중에 저녁 술 약속 깨진걸 안타까워하거나 가요 톱 텐 못 볼 걸 아쉬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거다. 이건 그 프로그램 피디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누구랄 것도 없이 초미의 관심사는 생이별의 공포와 재결합에 대한 걱정이었다. 휴대폰은커녕 전화기조차 변변치 않던 시절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 사건을 검색하고 나서야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족을 못 쓰는 술자리나 티브이 프로그램 대신 가족부터 떠오르게 했을까. 그리고 무엇이 흩어질 것을 걱정해 다시 모일 궁리를 하게 만든 것일까. 무언가 작동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전 국민이 동시에 가족을 떠올리며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도록 만든 힘은 무엇일까.




우주는 네 가지 힘으로 구성된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다. 이 힘들이 물질을 생겨나게 하고 우주를 구성한다. 그리고 모든 자연 현상은 이 힘으로 설명된다. 달리던 차가 급정거하며 한 바퀴 도는 현상도, 음식을 먹고 분해되어 흡수되는 과정도. 그런데 만일 이 힘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면 우주는 어떻게 될까. 우주 역사상 두 번째 빅뱅이 일어날 거다. 그리고 다시 무로 돌아갈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이루는 힘, 구성원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존재한다. ‘애착관계’라고 하는 심리적 에너지다.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집으로 달려갈 생각을 하게 하고, 흩어질 걸 대비해 모일 방법부터 생각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힘이다. 생이별을 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 이 힘을 작동시킨 거다.


이 힘은 본능에 가깝다.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따뜻함과 안전함 그리고 권위의 근원인 엄마 품으로 기어간다. 정신없이 놀다가도 “00아 밥 먹어” 소리에 다들 집으로 달려간다. 몸과 마음은 오징어 게임에 있지만 애착관계라고 하는 심리적 안테나는 엄마 음성에 맞춰져 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토요일마다 책모임에 나가게 하는 것도 다 이 힘이다. 타국에 산지 수십 년이 지나도 “이국땅에서 고생하시는 700만 재외동포 여러분”이란 멘트에 눈물짓게 되는 것도 바로 이 힘이다.


과거 부모들은 이힘으로 자녀를 키웠다. 글자를 몰라도 양육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전무함에도 열명 남짓한 자식을 거뜬히 키워낸 것도 이 힘 덕이다. 이 힘으로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바라보게 만들고 의존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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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급격한 산업화와 정보화로 사회 맥락이 바뀌면서 이 힘은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이 힘으로부터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관계가 고통이고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언택트(untact) 시대가 앞당겨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기대의 지뢰밭인 사람보다 그런거 없는 스마트폰이나 반려동물과의 상호작용이 편하고 즐겁다. 우리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이 끈이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그 힘은 더 약해졌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보여준 미래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러다 관계 같은 거 다 필요 없으니 차라리 없애자는 얘기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관계나 감정이 사라지고 기능만으로 연결되어 돌아가는 영화 속 리브리아를 경험하지 않으려면, 관계로 인한 고통과 피해, 즉 갈등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계의 진정한 이퀼리브리엄(평형, 균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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