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명약

인정에 대하여

by 장동혁

그날도 나는 신호에 따라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옆 차량이 차선을 이탈해 내 쪽으로 돌진하듯 들어왔다. 놀란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차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피해 지나갔다. 그로 인해 나는 맘에도 없는 큰 절을 해야만 했고, 조수석에 있던 가방과 노트북은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린 뒤 옆을 보니 가해(?) 차량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쏜살 같이 달려 나갔다. 하도 어이가 없어 다음 신호에 그 차 옆에 가서 멈추었다. 그리고 운전자를 확인했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쥔 운전자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때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부딪칠 뻔 하긴 했지만 실제 부딪친 건 아니니 차량 피해는 없었다. 소중한 노트북이 굴러 떨어졌지만 그건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진짜 나를 화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부정당한 것일까.


급작스런 돌진에 나는 급정지를 해야만 했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내 소중한 물건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때 나는 분명한 피해자였다.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상대 행동으로 볼 때 그는 나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나는 상대로부터 피해자임을 부정당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부정당했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부모로서, 아들로서, 배우자로서, 교사로서. 때로는 나의 경우처럼 피해자로서 말이다. 많은 갈등 뒤에는 의도를 했든 아니든 부정당함과 그로 인한 분노가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동호회 행사 일정을 직접 듣지 못하고 나중에 누군가를 통해 듣는다면 어떻겠는가. 무척 서운하고 화가 난다. 구성원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행사를 주도하는 사람과 관계가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계산이 가능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지만, 부정당함으로 인한 감정적 피해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게 사실이다.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그걸 피해로 보기보다는 좀 더 가벼운 의미의 상처 정도로 생각한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산 가능한 실제 피해보다는 감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를 살필 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인정해줘야 할까. 인정이란 상대의 정체성, 감정, 욕구, 신념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나로 인해 당신이 피해를 입었고, 그 때문에 화가 나셨겠네요”가 인정이다. 내 의도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상대가 화가 났다는데, 왜 화를 내냐고 물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로 안 보고 말면 그만인 운전상황이야 몇 시간 씩씩대다 말겠지만, 소중한 관계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히 가족 간 인정 문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하고, 그로 인한 상처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내 존재, 생각, 감정을 부정당한다면 관계는 결코 좋아질 수 없다.


사랑, 경청, 공감은 건강한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되지만 주관적이다. 그리고 타고나거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인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정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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